주간동아 320

2002.01.31

체력? 조직력? 갈 길 바쁜 히딩크호

축구대표팀 ‘창조적 공간’ 만들기 미흡 … “월드컵 본선까지 페이스 유지” 선언

  • < 로스앤젤레스=최영균/ 일간스포츠 특파원 > ck1@dailysports.co.kr

    입력2004-11-10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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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력? 조직력? 갈 길 바쁜 히딩크호
    ‘기관차처럼 달릴 수 있으면 유럽과 남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월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2 북중미골드컵축구대회 한국과 미국의 첫 경기는 히딩크 감독의 평소 지론을 그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결국 승부는 1대 2 패배였고 국내 언론들은 LA갤럭시와의 경기에 연이은 쓴 소식에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히딩크 감독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

    패배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의 결과로 선수들 몸이 무거워 상대의 빠른 공격수를 쫓아가지 못해 내준 두 골이었다. 그러나 새로 선보인 3-4-1-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경기 내내 미드필드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미국팀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이날 경기를 마친 후 히딩크 감독은 “훈련 성과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팀 조직력이 성장한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한다”고 말했다.

    미국전을 앞두고 1월9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대표팀은 2월15일까지 38일간의 장기 해외 전지훈련을 진행중이다. 골드컵 대회(1월20일~2월3일)가 끝난 뒤에는 우루과이로 이동해 2월14일 우루과이 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를 예정. 20일 미국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은 그동안의 훈련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번 전지훈련에서 대표팀과 히딩크 감독의 당면과제는 ‘체력’과 ‘전술’. 대표팀은 전지훈련 기간 동안 축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두 요소를 골고루 배합한 프로그램을 소화해냈다.

    미국에 온 뒤 일주일 가량 머물렀던 샌디에이고에서는 주로 부분 전술을 다듬는 훈련을 실시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기가 패스를 받고 움직일 공간만 만들면 되는 차원에서 벗어나 공간을 복합적으로 창출하는 창의력을 가질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는 골키퍼부터 수비수, 미드필더를 거쳐 최종 공격수까지 서로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연쇄적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면 효율적이고 빠르게 상대 진영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20일 경기는 선수들의 공간 감각이 아직 미숙함을 보여줬다. 특히 수비라인이 일자 형태로 올라오면서 공격수 바로 앞에 짧은 패스를 하는 모습이나 미드필드에서 공을 잡아 몰고 나가려는 경향 등은 자연스런 공수 연결과 시원한 공격 진행을 방해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센터링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비 위치를 잡지 못한다거나, 볼에만 집중하면서 쇄도하는 상대 공격수를 놓치는 실수는 여전히 눈에 띄었다.

    16일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한 대표팀은 전체 전술로 훈련의 포커스를 바꾸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번에 새로 선보인 시도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단연 3-4-1-2 포메이션의 채택. 지난해 4월 LG컵 이집트 대회에서 사용한 후 한동안 볼 수 없었던 3-5-2를 변형한 전술이다. 지난해 12월 미국과의 평가전을 승리로 이끌어 좋은 평가를 받았던 3-4-3이 공격을 강조한 전술이라면 3-4-1-2는 수비에 초점을 둔 포메이션이다.

    3-4-3은 중앙 미드필더 두 명이 종으로 서서 위쪽의 미드필더가 공격에 치중하고 전방의 스리톱 중 양 날개가 좌우 측면을 돌파해 적극적으로 찬스를 만들어내는 형태의 포메이션이었다. 하지만 3-4-1-2는 미드필더 4명이 횡으로 서 수비수 3명과 함께 수비에 치중하고 ‘1’에 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한 명과 투톱에게 공격 대부분이 맡겨진다. 이러한 실험은 히딩크 감독이 그리는 대표팀의 모델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공격전술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고 판단한 히딩크 감독은 강한 수비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새로운 카드로 3-4-1-2를 실험하고 있는 것.

    미국전을 통해 감독의 실험은 상당 부분 성공으로 나타났다. 후반 초반 최진철이 퇴장당한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했던 송종국이 중앙수비로 내려가기도 했고, 이어 후반 27분 교체 투입된 이영표가 오른쪽 윙백 역할을 맡는 등 포백과 스리백을 오가는 전술 변화가 무리없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미국 훈련에서 대표팀이 가장 중점적으로 가다듬은 것은 역시 체력과 스피드였다. 그간 나이와 경험에 얽매이는 대신 빠른 발과 강한 스태미나를 가진 ‘재료’들로 팀을 구성해 온 히딩크 감독은 이번 전지훈련을 통해 ‘요리’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훈련기간 동안 선수들은 감독으로부터 들들 볶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샌디에이고 캠프 훈련 이틀째인 10일. 히딩크 감독은 훈련 강도를 급격히 높이며 “3월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파워, 이후에는 지구력을 키우는 것이 월드컵 준비의 핵심 과제”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한마디로 꾀피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 오전에는 샌디에이고 인근 클레어먼트 메사의 힉맨 필드에서 두 시간 동안 쉴틈없이 달려야 했던 선수들은 오후에는 숙소인 로스 코로나도 베이 리조트 주변을 뛰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했다.

    코칭 스태프는 헤딩이나 슈팅 같은 개인 기량 훈련 역시 짧은 시간에 빠르게 반복해서 실시하는 방법으로 운동량을 높였다. 5대 5 혹은 6대 6으로 펼쳐진 미니 게임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라도 발이 땅에 붙어 있는 선수들에게는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선수들의 입에서 “아이고 죽겠다” “이런 훈련은 생전 처음”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지난해 12월9일 서귀포에서 열린 미국과의 평가전 이후 긴 휴식기를 가진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 훈련은 다소 무리였다. 한 달여의 휴식으로 노곤해진 선수들의 몸에 큰 부하가 걸리자 훈련 시작 2~3일 무렵 서서히 잔병치레가 시작됐다.

    고참인 황선홍, 최용수는 그렇다 쳐도 ‘젊은 피’인 김남일, 이천수 등 핵심 선수들 역시 불쑥 찾아온 감기 몸살과 고열에 시달렸다. 황선홍은 해열 주사, 김남일과 이천수는 김현철 상임 주치의로부터 열을 내리기 위한 마사지 요법을 받기까지 했다.

    송종국이나 최태욱처럼 이전에 문제가 있었던 부위에 무리가 와 훈련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선수들도 생겼다. 송종국은 왼쪽 무릎 뒷근육, 최태욱은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의 통증이 재발했다. 선수들은 0대 1로 패한 LA갤럭시와의 17일 연습 경기는 물론 20일 미국전까지 제 컨디션을 찾지 못했다.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단호했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 본선까지 일관된 페이스로 체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던 것. 미국전에 선수들 몸 상태를 맞추다 보면 큰 계획을 추진해 나가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 현지에 따라온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은 “국내 지도자 같았으면 패배할 경우의 여론이 두려워 미국전에 모든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며 감독의 뚝심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20일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전술 훈련이 무리없이 반영된 경기 내용은 히딩크 사단의 발전을 입증해 줬다는 평가다.

    이젠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 해서는 안 된다. 히딩크 감독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6월을 향한 장기 플랜’이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믿음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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