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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침몰하는 일본 경제

멀고도 험한 불황 탈출구

92년 9월 이후 10차례 경기대책 약효 없어 … ‘개혁’ 고삐 당기면 2006년쯤 새롭게 태어날 듯

  • < 김도형/ 계명대 교수·경제학 >

멀고도 험한 불황 탈출구

새해 들어 일본 열도의 화두는 하나같이 ‘헝그리 정신’ ‘일본 부활’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외침에 여전히 메아리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80년대는 일본, 90년대는 미국’이라고 할 정도로 지난 20년간 양국 경제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왔다. 일본은 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위기를 극복하고 80년대 중반 이후 메카트로닉스 혁명의 꽃을 피우면서 일본적 시스템의 우수성과 보편성을 세계에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80년대 미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나자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엔·달러 환율을 85년 달러당 242엔에서 87년 말 130엔으로까지 낮추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달러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일본은 87년 대규모 내수 진작책을 펼치면서 미국의 일본 시장 실질개방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거품 붕괴의 조짐은 이처럼 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87년의 블랙 먼데이, 88년 12월 소비세 도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가는 다케시다(竹下) 총리 취임일인 87년 11월6일 2만1036엔에서 퇴임일인 89년 5월6일 3만4266엔으로까지 수직상승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 정책 실패가 오늘날 일본 장기불황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 정부는 진작부터 제기된 국내 세제개편과 국제분업강화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간 금리인하를 통한 금융완화 정책만 고수, 거품을 팽창시켜 온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개혁 없이 내수확대만 좇아온 결과 오늘날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같은 해 12월 부시·고르바초프의 몰타 냉전종식선언도 일본 거품경제 붕괴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 통일 이후 세계 시장의 자금 수요 확대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정부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에 유입된 단기자본은 유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뒤늦게 대출총량 규제와 잇따른 금리인상 등의 시장개입 조치를 통해 경기를 냉각시키고 일시에 거품을 붕괴시켜 버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일본 장기불황의 씨앗은 80년대 미국 레이거노믹스의 고달러 정책 후유증 처리와 냉전구조 와해라는 국제 정치질서 변혁과정에서 잉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고도의 창의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는 그동안 고도성장을 유지해 온 시스템은 물론, 기업과 기업, 기업과 정부 간 관계가 동맥경화증을 일으키고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대응이 늦은 것도 최근 불황의 원인이다.

90년대의 장기불황을 거친 뒤 일본 정부는 99년 11월, 경기 자율회복의 조기 달성과 21세기형 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20세기 최후의 대형 경제대책을 집행한다. 그러나 18조엔 규모의 경제대책에도 불구하고 민간수요 부진, 고용악화, 지가·주가 하락, 설비·채무·인력의 과잉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 1년 뒤 다시 11조 엔 규모의 ‘일본신생(日本新生)을 위한 신발전 정책’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로써 일본은 92년 9월 이후 모두 10차례의 대형 경기대책으로 135조9000엔을 투입하게 되고 국가 채무는 2001년 말 666조 엔(지방채무 184조 엔 포함)으로 GDP 대비 128.5%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만약 일본이 유럽 대륙에 자리잡았더라면 진작에 EU 회원국 자격을 상실했을 정도다.

반면 이러한 상황에 발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재정금융정책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제로금리정책 부활에도 불구하고 기업금융 루트는 단절됐고 벤처자금은 대부분 외국 연기금투자가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유일한 대안은 최근 보여지듯 엔 약세의 용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수출 감소와 해외생산 증대라는 추세 속에서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통화절하 경쟁을 유발하는 등 아시아의 수입수요 축소를 통해 기존의 대 아시아 수출은 오히려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성역 없는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증대되는 디플레 압력을 완화하려면 당분간 엔화 약세 용인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게다가 9·11 미 테러사태 직후의 물류 혼란으로 인한 국내 생산ㆍ소비 부진에 이은 아프간 전쟁 발발은 미국의 경기후퇴를 가속화하고 세계 동시불황→수출 감소→재고조정과 기업수익 개선 지연→고용ㆍ소득ㆍ소비 환경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의 절대적 성원을 받을 만한 개혁작업은 이미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현 고이즈미 내각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각종 공기업 등 특수법인 개혁도 본궤도에 오르기까지는 관련법 재개정에 따르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존 추가부실도 2∼3년 내 모두 처리하기에는 벅차다. 중요한 것은 별도의 추가부담 없이 고비용·저효율 공급구조를 어떻게 개혁하는지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도 성장률이 지난해에 이어 마이너스 0.8%로 5년 연속 명목성장률이 실질성장률을 하회하는 이른바 ‘명실역전’(名實逆戰) 현상이 뚜렷하지만 하반기 회복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규모 감세와 금리인하 효과가 나타나고 일본에서도 정보기술(IT) 산업 등 비제조업 분야의 잠재설비투자가 서서히 진행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일본은 국내외 가격차 해소와 유효수요 확대를 통해 2003년도부터는 자율성장을 향한 기지개를 펼 수 있을 것이다.

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고용과 임금은 최악상태를 극복하고 있고 모바일 계통 중소기업의 설비투자 회복, 도심맨션의 가격 하락과 대형화 추세에 따른 고령자층의 도쿄 도심 회귀 현상 등 호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독자기술과 브랜드를 고집하는 무수한 세계 일류 중소기업들의 저력, 실용화 시기만 호시탐탐 노리는 막강한 기초기술력, 1400조엔의 개인금융자산은 분명 일본의 잠재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잠재력을 구현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은 다음과 같은 경제회생 대책에 우선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첫째, 아시아 국가들과의 분업과 연대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각종 비관세장벽 등을 철폐해 국내외 가격차를 없애 나가야 한다.

둘째, 금리인하 효과가 제약된 상황인 만큼 주가·인플레 기대심리 상승→기업 수익구조 개선→채무자 부담 경감의 선순환 구조는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물가목표 설정(Inflation Targeting) 혹은 잉여자금에 의한 주식ㆍ부동산 매입 방식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위기에 빠진 재정재건은 경기대책과 병행 추진해야 한다. 특히 경기대책은 구조개혁과 직결되는 의료복지, 도시개발, 환경 등 중점 7개 분야 공공지출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부투자기관 등 특수법인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현 정권의 큰 업적이다. 그러나 경기회복 후 2010년경을 목표로 한 재정의 기초수지균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출을 합리화하고 증세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목표가 예정대로 추진된다면 일본 정부가 모토로 내세우는 ‘새롭게 태어나는 일본’(新生日本)은 2006년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주간동아 318호 (p28~29)

< 김도형/ 계명대 교수·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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