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계 분야에서도 가상현실 시스템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신도시, 공장, 빌딩, 고속도로 등의 설계도면을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전환한 후 그 세계에 들어가 미리 체험해 보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도면상에서 놓치기 쉬운 실수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 가상현실은 태풍이나 차량과 건물의 충돌 등 큰 규모의 실험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분양할 때 짓는 모델하우스도 가상현실로 대체할 수 있다. 가상현실 속에 만든 아파트에 들어가 여러 종류의 벽지나 페인트, 내장재를 골고루 사용해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손쉽고 간편할까. 다양한 가구를 직접 배치해 볼 수도 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무거운 가구라도 한 손으로 또는 한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분야 역시 가상현실이 유용하게 쓰이는 분야다. 가상현실 공간에서 해부학이나 수술연습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과 동영상을 이용하여 대인공포증·고소공포증·운전공포증 등의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해 임상실험에 들어갔다. 심장박동 시뮬레이션 결과를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가져오면 심장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혈액의 흐름이나 심장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인공심장의 설계에 큰 도움을 준다. 전투기 조종사의 훈련 등에는 이미 가상현실 시스템이 널리 쓰인다. 운전연습이나 면허시험도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하면 쉽고 안전하게 치를 수 있다.
가상현실 세계를 과학이나 공학 분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는 영문학 수업에 가상현실을 사용한다. 할렘을 배경으로 쓴 문학작품을 단순히 텍스트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시스템 속에 할렘을 구현한다.
노약자나 장애인의 복지, 또 관광이나 여행업계도 가상현실을 응용할 수 있는 분야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장시간의 비행이나 시차 적응에 대한 염려 없이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콜로세움 안을 거닐 수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나 백야, 남극의 펭귄을 구경하고 바다 속을 탐험하기도 한다. 이동에 필요한 시간, 여행 경비는 물론, 환경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경주문화엑스포2000의 가상현실 영상관은 고대 경주 시가지를 재현해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상현실을 체험하기 위해 널리 쓰는 방법은 특수하게 제작한 고글형 안경을 쓰는 것이다. 이 밖에 쌍안경을 사용하거나 모니터로 가상현실을 보기도 한다. 현재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시스템은 일리노이 대학교의 가시화연구소(http://www.evl.uic.edu)에서 만든 케이브(cave) 시스템이다. 케이브는 이름 그대로 동굴형 시스템이다. 전방은 물론 좌우측면과 밑면에 스크린을 배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가상현실 공간 안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특수장비다. 이 시스템에서는 사람이 스크린에 둘러싸일 뿐만 아니라, 시선이나 움직임에 따라 화면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시스템보다 현실감이 뛰어나다. 최근 국내 최대 규모인 5면으로 이루어진 케이브 시스템인 ‘시모어’(SeeMore)를 도입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원장 조영화) 슈퍼컴퓨팅센터는 매주 화요일에 이 시스템을 일반에 공개한다.
케이브와 같은 몰입형 가상장치를 광대역의 인터넷에 연결하면 미국-한국처럼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이나 장비가 가상공간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다. 원격지에 떨어진 실험장치를 직접 다루거나 원격지 수술도 가능하다. 단순한 화상회의가 아니라 실제 눈앞에서 펼쳐진 3차원 자료를 가지고 3차원으로 나타나는 상대방과 직접 교감을 나누면서 가상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다.
1930년대 최초의 비행 시뮬레이션을 개발한 이래 가상현실 연구는 지속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미 1937년 할리우드에서는 최초의 3차원 입체영화 ‘3차원 살인’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윌리엄 기브슨과 브루스 스털링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에 의해 가상현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가상현실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컴퓨터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1990년 이후다.
이상적 가상현실 시스템은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뇌를 직접 조작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가상현실과 실제공간을 착각하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술이다. 이에 비하면 사람의 눈이나 귀 등의 오감을 속이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고 안전하다. 현재의 가상현실 시스템들은 모두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개발하고 있다.
주간동아 305호 (p7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