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7

2001.08.16

美 대학가 덮친 한여름 ‘취업한파’

기업들 경기침체로 인력 채용 급감… 해고자들과도 경쟁하느라 취업문 더 좁아져

  • < 방형국/ 볼주립대학 초빙연구원 > hkbahng@bsu.edu

    입력2005-01-18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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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대학가 덮친 한여름 ‘취업한파’
    ”졸업이 3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오라는 회사가 없네요. 1년 전에만 졸업했어도 사정은 크게 달랐을 겁니다. 조그만 회사들도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부모님 사업도 잘 안 되어 MBA 공부를 하면서 기간을 연장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인디애나주 볼주립대학교에서 컴퓨터사이언스(대학원 과정)를 전공하는 이태형씨(31)는 하계 졸업식을 앞두고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1년 전만 해도 이 대학교 컴퓨터사이언스 전공자들은 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밸리를 비롯, 뉴욕 보스턴 등에 있는 시스코 시스템스, 오라클 등 첨단기업들을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신규인력을 채용하려는 기업이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난해부터 워싱턴주 리치몬드 소재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해 왔다. 연봉을 빼고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씨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적어도 경기회복이 감감해 보이는 현재로는 그렇다. MS는 물론이고 대부분 기업들이 기존 인력을 줄이는 판국에 신규인력을 채용할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주변의 미국인 학생조차 취업이 안 되는 것으로 한가닥 마음의 위안을 삼지만, 이씨는 1년 내 일자리를 잡지 못할 경우 맨손으로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나마 석사 졸업자 수준에 맞는 연봉을 받아야 미국 이민국이 진짜로 일자리를 구한 것으로 인정, 학생비자를 취업비자로 변경해 주기 때문에 적어도 3만~4만 달러 이상을 주는 기업에 취업해야 한다.

    지난해 가을 30년 만에 최저인 3.9%를 기록한 미국의 실업률이 최근 가파르게 상승, 대졸자들의 취업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 6월 현재 4.5%. 이는 지난 5월의 4.4%보다 0.05%포인트 높은 것이다. 같은 기간 신규채용 인원이 11만4000명이나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3개월 연속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美 대학가 덮친 한여름 ‘취업한파’
    특히 올 들어 해고된 인원은 전국적으로 70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이 2∼3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이른바 ‘닷컴기업’에 취업한 실력 있는 취업 희망자들로 파악된다. 이번 하계 졸업 예정자들은 이들과도 한판 취업경쟁을 벌여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이 대학 비즈니스 스쿨 1층에 마련한 게시판에는 10여 년의 호황을 마감하고 하강곡선을 그리는 미국경제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MBA 과정이 미국 전체에서 순위가 높아 비즈니스 스쿨 게시판에는 6개월 전만 해도 MBA 과정 전공자를 유혹하는 유수 기업들의 취업 안내서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 게시판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유일하게 시티뱅크에서만 약간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취업 안내서가 붙어 있지만 그나마 근무처가 미국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터키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로 가야 하는 자리다. 대졸자들의 취업난은 대학가와 졸업 예정자들의 가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졸업 예정자들의 취업난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중소 로컬 은행들. 미국 대학의 경우 대개 2학년(학부생 기준)부터 등록금을 비롯, 약간의 생활자금을 은행에서 장기저리에 융자 받을 자격이 생긴다. 상환조건은 취업 후 몇 년에 걸쳐 갚는 것. 이같은 융자제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취업이 워낙 잘 된 지난 1998년 이후 활성화했으며, 이번 졸업 예정자들이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이번 졸업 예정자들이 취업하지 못하는 바람에 융자금 상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보증을 선 부모들에게 돈을 갚으라는 안내서를 보내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로컬 은행들이 부모들에게 보낸 융자금 상환 독촉장은 미국 가정에 ‘리버스 네스티 신드롬’을 확산시키고 있다. ‘네스티 신드롬’은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 대부분이 대학 기숙사나 인근 가정에서 하숙하기 위해 가정을 떠나는 데서 부모들의 마음이 허전해 생긴 병을 일컫는다.

    ‘리버스 네스티 신드롬’은 자녀들이 대학 졸업장은 있지만 취업 통지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은행들에게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든데다 자녀는 가정을 비운 채 학교 근처에 계속 남아 있는 부모들의 마음의 병을 가리키는 말.

    필자의 옆집에도 이번 대졸 예정자 1명과 졸업생 3명이 함께 사고 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4명이 함께 살며, 학과 사무실을 오가거나 도서관 컴퓨터 랩실에서 인터넷으로 취업정보를 알아보고 있다. 이들은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어서 혼다 어코드 등 값비싼 자동차를 몰고 다녔으나 최근 자동차를 처분하고 중고 지프 한 대를 사서 공동으로 쓰고 있다.

    美 대학가 덮친 한여름 ‘취업한파’
    이번 졸업 예정자인 존 리치군(23·경영학) 역시 졸업을 해도 취업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고향인 미시건에 당장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는 대학 인근 골프 연습장에서 새벽에 골프볼을 시간당 6달러씩 두 시간 동안 줍고, 대형 쇼핑센터인 마시(Marsh)에서 하루 4시간씩(시간당 8달러)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돈으로 하숙비 등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다. 파트타임을 하면서 도서관이나 학과 사무실에서 취업정보를 알아보는 게 그의 일과.

    “인디애나폴리스를 비롯해 시카고, 신시내티, 네시빌, 디트로이트 등 인근 대도시에 있는 회사 모두에 이력서를 내봤지만 아직 연락 온 곳은 없다. 생각보다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최근 비틀거리는 미국경제와 그로 인한 취업난을 잘 반영한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학생들의 표정이 어둡다 보니 이들이 사는 아파트촌도 음산하기는 마찬가지다. 하계 졸업 시즌인 이맘 때면 졸업 및 취업 축하파티로 아파트마다 불야성을 이루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이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취업난으로 재학생과 대학가 인근에 사는 주민도 재미 하나를 잊어버렸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졸업생들의 물건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었으나 올해는 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해마다 졸업시즌이면 취업에 성공한 졸업생들이 평소에 쓰던 컴퓨터 서적 의자 CD 옷 등 별의별 물건을 정원 차고 등에 내다 놓고 파격적인 가격에 처분하는 ‘야드 세일’ ‘거라지 세일’이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올해는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지 않고 대학가에 계속 남아 있는 졸업 예정자들이 많아 ‘야드 세일’ ‘거라지 세일’에서 쓸 만한 물건을 싼값에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정은 대학 인근 맥주집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해 같으면 졸업 및 취업 분위기에 들떠 밤새도록 술잔이 오가지만 최근에는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손님의 발길조차 뜸하다. 그나마 금요일에도 맥주집 밖 도로에 놓은 파라솔 자리에나 손님들이 있고 정작 맥주집 안은 텅텅 비기 일쑤다.

    취업난은 급기야 학생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과 ‘도전정신’을 ‘아주’ 작게 만들고 있다. 온라인 취업전문 회사인 몬스터닷컴(monster.com)이 최근 대학 졸업생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없다”는 응답자가 작년 1%에서 올해에는 무려 27%로 급증했다. 회사를 제 손으로 차리겠다는 응답자도 작년 26%에서 올해에는 12%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7월18일 미 하원 금융위원회에서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이사회(FRB) 의장은 “미국 경제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점이 노출해 있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갖고 처방에 임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가뜩이나 어두운 미국 대학가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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