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7

2001.06.07

“한국 인문학 자기 성찰의 계기”

‘식물적 삶’에 안주 절실한 문제 의식 외면… ‘도올현상’이 제기한 문제 되새겨봐야

  • <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pjyoon@kornet.net >

    입력2005-02-01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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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인문학 자기 성찰의 계기”
    도올 김용옥의 전격적 퇴장, 그것은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그다운 깜짝쇼로 보인다. 사뭇 고답적인 퇴장의 말을 남기고 표연히 사라진 그는 ‘지적(知的) 엔터테인먼트’의 달인(達人)이자, 행위예술의 대가(大家)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듯하다. 수많은 시청자들을 열광시켰고, 적지 않은 숫자의 전문가들을 격분케 한 도올의 TV 논어 강의는 이렇게 미완성형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찬사와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작 잊힌 것은, 논란 많은 ‘도올 현상’이 한국 인문학에서 갖는 의미에 대한 반성이다.

    요사이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인문학 위기 담론이 무성하다. IMF 사태 이후의 실용학문 중시 경향이 학부제 도입과 BK21 기획 시행과 맞물려 인문학이 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 전공 교수들은 기초학문 없는 대학의 존재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며 울분을 토한다.

    이 와중에 지원학생이 거의 없어 폐과(廢科) 사태를 맞은 어느 지방 사립대학 철학과의 운명은 모든 것을 경쟁력의 잣대로 재단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인문학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거론된다. 그리하여 ‘철학 없는 대학이 과연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절규가 자연스레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인문학 위기론자들은 인문학이 죽은 사회는 ‘혼 없는 육신’ 같은 것이라 주장하며, 지원정책을 내놓으라고 행정 당국을 다그친다.

    이런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런 원론적 지당함은 긴박한 하나의 질문을 은폐한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혼’의 역할을 제대로 했느냐는 의문이다. 불행히도 이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이다. 이런 자기 성찰이 없는 인문학 위기론은 위선적인 호들갑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학문 변천사를 고려하지 않는 인문학 위기론은 매우 일면적이다.

    “한국 인문학 자기 성찰의 계기”
    서양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장악한 근대 이후 인문학의 위기는 구조화해 왔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능력이 입증되고, 산업혁명과 연결한 과학기술이 생산력 창출의 주체가 되는 과정에 반비례해 인문학의 위상이 초라해졌기 때문이다. 효용성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기술문명시대에 인문학의 위기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인문학 위기담론’은 수백 년의 자체 역사를 갖지만, 그것의 본격 출현은 근대 이후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인문학인 동시에 국정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유학의 전통이 일제 통치와 함께 철저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만을 문제 삼는다면, 현대 한국에서 인문학이 언제 사회의 본류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특히 개발독재 체제에서 인문학은 교육제도 차원에서도 늘 홀대받아 왔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가.

    혹시 인문학 위기론의 배경에는 인문학자들의 생활상 위기, 특히 대학제도 변화로 말미암은 인문학 전공 교수들의 ‘밥그릇 위기의식’이 자리하는 것은 아닌가. 제도상의 불이익이 이렇게 급박해지기 전에 한국 인문학은 교육체제가 보장한 틀 안에서 대부분 ‘식물적 삶’을 누리며 안주해 왔다. 보편성과 학문성의 미명으로 철옹성을 치고, 한국인의 일상적 삶에서 나오는 절실한 문제의식을 나 몰라라 한 것이다. 그 결과 인문학 위기담론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문학의 중추는 문학-역사학-철학 등으로 구성되어 왔다. 그렇다면 문-사-철의 다양한 전공영역을 꿰뚫고 흐르는 태생적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무엇이 인문학으로 하여금 혼의 역할을 자임하게 만들었으며, 인문학을 인문학답게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이 우리네 삶의 무늬와 결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담아내는 실천이며, 존재와 역사의 의미에 대한 탐색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곧 인문학은 일상적 삶의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들을 궁극적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자기네들의 절실한 문제의식을 학문적으로 담아냄으로써 위기에 대처해 온 서양 인문학과 비교하면, 현대 한국 인문학은 누추한 얼굴을 가릴 수 없다. 이 땅의 인문학 위기담론이 이 얼굴을 애써 가리려 할수록 위선적 성격은 증폭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용옥 현상’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절실한 현재진행형의 문제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인문학적 연구 사례다. 한편으로 그것은 고답적인 철학조차도 발 빠르게 상품화하는 대중소비사회의 게걸스런 식욕을 보여준다.

    서양의 논리가 관리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동양적인 것’에 대한 일반 대중의 향수와 욕망을 어루만지는 데 김용옥은 탁월한 재능을 과시한다. 그는 노자와 공자라는 심오한 사유의 아지랑이를, 재미라는 당의정으로 포장해 인스턴트식(食)으로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도올의 이 제품이 먹기 편한 데 감명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건강(마음의 양식)에도 좋은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의 뜨거운 반응은 도올 강의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음을 뜻한다. 도올 강의 이전에는 보통 사람들과 철저히 단절된 한문 고전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육성으로 말을 걸어옴으로써 대중과의 교감이 가능해졌다. 전문가들은 도올의 한문 해석의 정확성을 문제 삼고 또 그런 비판은 마땅한 것이지만, 이것이 김용옥의 작업이 갖는 가치를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도올 강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뜨겁다. 지식인이나 교수들의 경우에도 비(非)인문학 전공자들의 평가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호의적인 편이다. 이에 비해 인문학 교수들의 평가가 가장 인색하며, 특히 철학 교수들은 사뭇 적대적인 태도로 시종할 뿐이다. 이건 과연 무엇을 뜻할까. 인문학 전공자들의 신랄한 반응은 김용옥의 학문적 부실함, 그리고 그의 TV 강의의 천박성을 입증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김용옥 현상’은 이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한국 인문학의 자기 반성을 강제한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김용옥이라는 ‘지식인 스타’의 탄생에 대한 제도 인문학, 특히 강단 철학계의 극렬한 반발에는 그동안 한국 인문학과 철학이 철저히 실패해 온 ‘보통 사람들과의 만남’을 김용옥이 성취했다는 데 대한 열등의식이 작용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도올 강의는 매우 선정적이고 충동 유발적이라는 의미에서 반(反)인문적이었다. 인문성은 자기 절제와 반성을 핵심 덕목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용옥 현상’이 내포하는 자기 모순적 특징은, 반인문적인 그의 강의 태도가 ‘살아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인문주의적 관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촉발시켰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스턴트식이라 해서 다 해롭다고 미리 선언할 것까지는 없다. 일회용 식품이 필요할 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일회용 식품에 질리면 우리는 다시 먹거리의 근본에 주목하는 것이다.

    도올은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 성급한 찬반 논리에 휘둘리기 전에 우리는 ‘도올 현상’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분히 새겨야 한다. 밖에서의 지원을 요구하기 전에 한국 인문학은 먼저 ‘스스로 자기를 돕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우리네 삶의 무늬와 결을 담아내 보편적으로 승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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