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5

2000.12.28

질보다 양? 비전 없는 금융구조조정

질적 개혁과는 거리 먼 물리적 합병뿐… 위축된 실물경제 발목 잡을 수도

  • 입력2005-06-13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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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보다 양? 비전 없는 금융구조조정
    김상훈 국민은행장은 12월14일 아침 노조의 38시간 감금사태 끝에 “주택은행과의 합병논의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에게서 전화로 원색적인 질책을 들었다. 질책내용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다된 밥에 코 빠뜨렸다”는 것.

    그날 정부의 반응을 가감(加減)없이 전달하면 이렇다. “대한민국은‘노조공화국’인가,‘시너공화국’인가” “명색이 행장이면 노조가 위협할 때 차라리 한 대 맞고서라도 버텼어야지” “합병은 대주주가 결정하는 것이지 노조가 하는 게 아니다.”

    진념 재경부장관 등 경제팀은 지난 9월부터 “우량은행간 합병이 곧 가시화한다”며 ‘초대형은행’(슈퍼뱅크)의 탄생을 기정사실화해왔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런 홍역을 치르면서 은행끼리 합쳐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고 고객서비스는 어떻게 나아지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정부는 은행수, 점포, 인력 등이 포화상태인 ‘오버뱅킹’(Over-Banking)을 그 이유로 꼽는다. 이를 해소하지 않고선 과당경쟁, 중복투자를 줄일 수 없다는 논리다. 금감원 관계자는“향후 인터넷뱅킹 등 전자금융이 활성화하면 인력과 점포가 많은 은행일수록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물론 노동집약적인 국내 은행들은 과당경쟁 탓에 수익원인 예대마진이 미국(5%대)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은행들은 운용금리(여신, 채권금리)만큼 조달금리(수신)를 낮추지 못해 3년 연속 적자에다 위기에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질보다 양? 비전 없는 금융구조조정
    그런 의미에서 국민-주택은행간 합병을 금융구조조정의 시금석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연세대 하성근 교수는“닮은꼴인 두 은행이 합치면 중복과잉투자를 막을 수 있고 원활한 구조조정이 뒷받침되면 국가경제 차원에서 합병을 추진할 만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매금융 위주인 두 은행을 합쳐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다고 해도 기업금융 국제금융 등‘범위의 경제’를 위한 우리나라의 대표은행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또 한빛은행(상업+한일)의 사례에서 확인되듯 국내 현실에서 대등한 합병은 조직마찰 등 부작용이 더 많았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는 “합병 뒤 조직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일어나는 온갖 부작용 탓에 더 큰 비용이 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두 은행은 점포의 3분의 2가 서로 500m 안에 인접해 있다. 두 은행의 직원 수는 2만6000명으로 전체 시중은행의 30%를 웃돈다.따라서 두 은행 경영진이나 정부에서 내세우고 있는 ‘인력 감축 없는 합병’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신한은행과 제주은행의 통합 역시 부실한 지방은행의 정리 외에 다른 효과는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제주은행의 총자산은 1조3000억원으로 신용금고업계 1위인 한솔금고 (1조5000억원)보다 적어 신한은행이 시너지효과를 갖기엔 부족하다. 금감위조차 “지난 7월 노정합의를 통해 은행 퇴출(P&A)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실상 P&A 효과를 내는 방안”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가 한빛, 평화, 광주, 경남은행 등을 금융지주회사로 묶고 외환은행까지 포함하는 방안도 조만간 확정된다.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넣어 클린뱅크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지주회사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문제는 지주회사 출범 뒤 기능을 어떻게 재편하는지에 달려 있다. 명지대 윤창현 교수는“가족을 해체하지 않고선 한지붕 아래 여러 가족이 한집살이하기 어렵다”면서 “지주회사 출범 뒤의 비전부터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이같은 은행구조조정 작업은 국가경제 차원에서 경제혈맥인 금융을 새판으로 짜는 효과가 있지만 당장 고객들에겐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 전산통합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은행간 화학적 결합과정의 부작용으로 금융시장 불안이 가중될 수도 있다. 투신, 종금, 금고 등 제2융권이 한결같이 위기상황인데 은행권마저 흔들리면 그나마 위축된 실물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정부는 이같은 은행 합병으로 금융구조조정을 매듭짓는다는 복안이지만 경제여건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난 98년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실물부문의 경기침체와 금융경색이 맞물려 이어지는 악순환을 해소하기 위해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다. 금융구조조정의 출발인 셈이다. 그러나 2년 전 상황이 어찌 보면 지금 상황과 너무 닮아 있어 신기할 정도다. 최근 제2의 위기설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다시 말하면 이는 사상누각 방식으로 추진해온 구조조정의 뒤탈이 올해 들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 대우자동차 매각 실패로 경제는 휘청댔고 수십조원을 쏟아부은 은행에는 또 7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다. 3년간 퇴출된 금융기관이 500개를 넘고 공적자금을 110조원이나 투입해도 금융구조조정은 여전히‘진행형’일 뿐이다. 주가는 반토막났고 퇴출, 감원, 파업 등 우울한 소식이 신문을 장식한다.

    질보다 양? 비전 없는 금융구조조정
    정부는 2차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의 질적인 개혁(금융시스템)을 추진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물리적인 퇴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학계나 연구기관 전문가들은 금융구조조정이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한 원인을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구조조정이 정치업적인 양 홍보되면서 너무 정치논리에 휘둘렸다. 올 2월25일 김대중 정부 출범 2주년을 맞아 정부는 ‘구조조정 완결’을 자축했다. 금감위 관계자는 “당시 정치권에선 총선을 의식해 구조조정의‘구’자도 못 꺼내게 하는 분위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둘째, 정부가 개혁의 초심(初心)을 망각했고 사회 전반에 구조조정 피로증후군이 만연했다. 은행파업 때 금감위원장은 노조에 “은행 퇴출(P&A)은 없다”고 합의해줘 지금 부실은행 정리에 애를 먹고 있다. 종금사나 신용금고까지 ‘퇴출없음’을 선언해 공적자금만 더 들어가고 있다.

    셋째, 정부정책(경제팀)이 신뢰를 잃었다. 전 경제팀은“공적자금 추가조성은 없다”고 버티다가 믿음을 잃었다. 현 경제팀도 지난 9월부터 매달 “이달 중 은행합병이 가시화한다”고 공언하고 “신용금고 한두 곳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이를 두고 김민석 의원(민주당)은 “한국판 ‘그린스펀 효과’를 기대한다”며 경제팀을 점잖게 꼬집었다. 그린스펀 미국 FRB(연방준비이사회) 의장은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으로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고도 정책효과를 냈다. 반면 우리 고위관료들은 입조심을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넷째, 정부의‘조급증’도 한 원인이다. 당정 고위인사들은 구조조정에 ‘언제까지’라는 식으로 시한을 뒀다. 이로 인해 제일은행, 대우자동차 등 해외매각 협상마다 파행을 겪었고 결국 시한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선진국에선 수십년간 시행착오를 겪고서 정착된 제도를 불과 3년 만에 무리하게 도입하다 체증에 걸렸다. 98년 국제기준의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도입, 99년 신자산건전성 분류기준(FLC)도입, 2000년 채권시가평가제 시행, 내년 예금부분보장제 시행 등이 그것이다.

    요즘 시중에는 돈이 엄청나게 풀렸다지만 제대로 돌지 않고 고객들은 금융기관을 믿지 못해 돈을 맡기고도 불안해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금융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종합과세나 예금부분보장제를 피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다.

    IMF 위기는 금융시스템이 무너지고 시장이 실패한 가운데 경제주체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됐다. 철저한 구조조정 없이는 IMF 위기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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