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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왜 지금은 미시사인가

작은 규모 역사 통한 새로운 접근…전통적 역사학 송두리째 부정, 파장 일파만파

왜 지금은 미시사인가

왜 지금은 미시사인가
서구에 미시사(Microhistory)라는 연구 경향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이고 우리나라에는 극히 최근에 소개됐다. 그러나 미시사라는 개념을 단순히 새롭게 등장한 역사연구 방법 중 하나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정치사 경제사 사상사 계량사 심리사처럼 전체 역사의 한 측면이거나 하나의 이론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시사는 전통적 역사학의 인식기반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입지를 확보하려 한다는 점에서, 충격의 파장은 역사학계 전반에 대단히 넓게 퍼지고 있다.

미시사란 말뜻 그대로 역사를 ‘작은 규모’를 통해 파악한다는 것인데, ‘작은’이란 말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미시사 연구는 역사의 실상을 밝히는 전통적인 접근방법, 즉 ‘거시적’ 접근방법이 오히려 허상을 추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여기서 거시적이란 전쟁, 혁명, 왕조의 교체, 경제체제의 변화, 사회세력의 대두, 사상운동 등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지배하고 규제한다고 생각되는 비인격적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규모의 역사서술은 과거 인간 한명 한명이 정말로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삶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전략으로 외부로부터(즉 거대구조로부터) 오는 충격에 실천적으로 대처했는지를 밝혀주지는 못한다는 게 미시사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오직 ‘잘 경계지어진’ 작은 규모의 역사단위에 대한 ‘미세’하면서도 ‘두터운’ 묘사만이 그 삶의 실상을 밝힐 수 있다는 전제다.

이렇게 볼 때 ‘거시사’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연구영역이 따로 있는가? 사실 거시사라는 말은 미시사가 등장한 이후 대칭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어일 뿐이다. 따라서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을 구분하는 것처럼 애초부터 거시사와 미시사의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시사가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전통 역사학의 대전제였던 ‘거대서사’(Grand Narrative)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역사서술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담론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른바 진보, 자유의 확대, 근대성의 발전, 평등사회의 실현 등 지극히 추상적이면서 모든 것을 포섭하려는 거대한 인식의 틀이 그 학문적 유파와 경향을 초월해 그동안 근대적 역사서술 전반을 지배해왔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미시사에서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구에서 등장한 미시사는 사실 다양한 갈래가 있어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 밖에 독일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도 각기 특유의 새로운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들이 공유하는 공통분모는 바로 그 연구대상이 실명을 가진 한 개인 또는 소수집단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개인이라 하더라도 전통 역사학에서 다루었던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라 주로 하층민, 농민, 여성 등 역사의 거대한 주류에서는 백안시되고 소외된 인물들이다.

미시사의 연구방법은 인류학의 ‘민족지학적 연구’를 연상시킨다. 또한 그 서술방법은 대상에 대해 미세하고도 중층적이다. 기존의 역사학, 특히 20세기 중반을 풍미하던 사회사적 연구가 익명의 제도나 체제에 대한 구조적 분석으로 영위됐다면, 미시사는 개인의 일상사를 둘러싼 의미의 그물망을 이야기체(Narrative)로 기술한다. 개별적 개인이나 소수집단을 다루는 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여러 기제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밝힐 때도 전통 역사학이 그랬듯이 구조적 관련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가 맺고 있는 복수적 관계의 의미를 단선적이고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복합적이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상호작용으로 보고 그 작용의 자율적 가능성을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미시사 서술은 문학작품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그 이유로 많은 독자에게 쉽게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현대 역사학에서 거시적 접근과 미시적 접근의 대립은 역사의 실상이 어디에 있고, 그 실상을 어떤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를 가름하는 역사인식론의 문제로 발전한다.

좀더 비근한 예를 들면, 천문학 물리학을 비롯해 우주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다루었던 근대과학의 경우, 이는 하나의 거대담론에 의해 지배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우주에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질서가 관류하고 있다는 전제다. 그것이 신일 수도 있지만, 과학의 대전제는 합리성에 의해 지배되고 과학적 방법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질서가 우주에 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런 낙관적 신념을 역사학에 대입한다면, 근대의 역사학 역시 그러한 낙관적 거대담론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근대를 통해 역사는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는 진보의 역사이며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결국은 그 합리적 질서가 전일화돼 가는 과정으로 파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실상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정확하기만 하다면 적절한 방법론을 가지고 그 실체를 분석하고 서술할 수 있었다.

근대과학 자체는 진보를 거듭해 왔으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창출됐다. 현대물리학이 미소세계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면서 그동안 가정된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이 심각한 회의에 직면한 것이다. 우주의 모든 요소 간의 관계는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이며 그들이 관련 맺는 방식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카오스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역사학이 추구되면서 역사학 자체는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 결과의 하나인 미시사의 등장과 함께 그동안 견지돼 왔던 거대서사의 체계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작은 규모의 대상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해서만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동시에 거대한 구조 그 자체가 인간생활의 실상이라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우주와 역사의 부분적 요소들간에 맺어지고 있는 단편적 관계들에 대한 잠정적인 이해일 뿐이다.

역사가 하나의 거대한 목적을 향한 장대한 행진이 아니라는 인식론적 도전은 비단 미시사 분야에서만 제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미시사는 그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커다란 역사인식론적 전환, 이른바 역사학의 ‘문화적 전환’의 결과 형성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우산 아래 위치한다.

1970년대 이후 ‘신문화사’(New Cultural History)라 불리는 새로운 역사서술 경향은 위에서 말한 역사인식의 전환을 한층 폭넓고 다양하게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문화사적 인식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인간행위의 모든 측면을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로 간주하여, 역사적 실상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의 그물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는 상징분석, 텍스트 이론, 언어적 전환, 수용미학 등 아주 여러 갈래의 이론적 논의를 포괄하는 것으로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제반논의와도 상통한다.

우리나라에 미시사가 소개된 후 한편에서는 한국사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방법론으로 환영받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인식론적 괴리 때문에 대단히 불편한 심기가 노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돼야 할 오해가 있다. 미시사란 단순히 ‘작은 규모’의 역사이고 ‘사소한’ 대상에 대한 역사라는 오해다. 구체적으로 기왕에 있었던 지역사, 지방사, 향토사 및 사례연구의 방법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고, 또 한편으로는 생활사와 풍속사는 모두 미시사라고 혼동하는 것이다.

미시사의 대상이 작은 규모라 해서 작고 사소한 것이 모두 미시사는 아니다. 또 한 가지, 미시사는 거시적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다시 집합적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의미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실체라는 점도 강조돼야 한다.

서구에서 미시사가 등장할 때도 처음에는 그런 불편함과 오해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적 비판과 반박이 심도 있게 진행되면서 오해는 점차 불식되고 있고, 이제 역사 인식의 지평을 또 한번 확장하는 의미 있는 역사연구 방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막 시작된 미시사에 관한 논의가 좀더 생산적인 차원에서 한국사 연구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간동아 2000.08.31 249호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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