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0

2000.06.29

정상회담은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다

국정원-아태 라인, 금년 3월 세번의 007접촉서 각본 완성…유례없는 ‘깜짝선언’ 이끌어내

  • 입력2006-01-25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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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회담은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다
    남북한 정상이 서명(수표)한 6·15 공동선언의 첫 항은 “남(북)과 북(남)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자주통일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6·15 공동선언을 도출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자체가 남북한이 ‘외세를 배격한 채 자주적으로 공조’한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였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트릭’이 적절하게 삽입된,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연출된 이 역사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 없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물론 이 드라마는 탈냉전의 시대조류와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 성숙,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대한 북한의 긍정적 인식 형성,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국제사회의 협조 같은 ‘무대장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두 김씨’의 역사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역사적 결단을 더욱 빛나게 해준 ‘조연’과 무대 뒤편의 연출자들이 뜻밖에도 남북한의 적대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집단인 국가정보원(임동원 원장)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김용순 위원장)라는 점이다. 이 세기적 드라마에서 더 깜짝 놀랄 만한 대목은 늘 무대 뒤에 숨어 있던 이 막후 연출자들이 ‘카메오’ 출연한 점이다.

    세기의 ‘깜짝쇼’는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첫 장면에서부터 연출되었다. 당초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가 영접하리라는 관객의 예상과, 주인공은 늦게 나타난다는 관례를 깨고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영접했다. ‘깜짝쇼’는 남측에서도 준비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에서 내린 공식수행원 중에서 가장 키가 작은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바로 대통령특별보좌역이라는 ‘모자’를 쓰고 카메오 출연한 임동원 국정원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이 드라마의 결말을 이미 눈치챘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계산된 연출이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이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조처를 취했었다.



    언론 통제가 그 첫번째다. 정상회담 기간에 취재가 공식 허용된 평양 주재 외국 특파원은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 1명, 중국 신화사통신 2명과 인민일보 1명 등 고작 4명이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북한 당국이 정상회담 준비 기간 이들에 대한 1대 1 밀착 감시체제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포착했다. 그것은 평양측이 이번 회담에서 ‘외세를 배격’한 채 남북한 공동취재단의 ‘자주적인 보도’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는 미 CNN 방송을 초청하지 않은 사실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했다.

    그 두번째 조처는 김대통령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기 직전에 북한측이 평양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말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당초 김대통령은 순안공항에서 도착성명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일반적인 외교관행과 상식으로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실제로 일부 외신들은 김대통령이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못하는 것은 회담 전망을 어둡게 하는 징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회담 전략팀은 이 메시지가 김위원장의 공항 영접을 뜻하는 ‘길조’라고 받아들였다.

    그 다음부터 2박3일간의 평양 일정은 연속된 ‘파격’과 ‘사변’을 낳으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더욱이 상봉 하루만에 두 정상이 공동선언에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는 소식이 평양발로 전해지자 세계는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세계 언론의 논평대로 정상외교사에서 ‘회담 하루만에 구체적 의제 합의는 전례 없는 일’(중국 신화사)이자 ‘역사상 유례 없는 빠른 합의’(미 CNN)였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사변)에는 이면(裏面)이 있었듯이 이번 6·15 공동선언 뒤에도 무대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그림’들이 있었다. 북한의 ‘조선신보’는 ‘6·15 사변’을 김정일 위원장이 ‘빈틈없이 설계’한 것으로 미화했지만, 두 정상이 합의문에 서명(수표)하기까지는 양측의 비공개 접촉 라인이 물밑작업을 한 흔적이 뚜렷하다. 전쟁까지 치르며 55년 동안 갈등과 반목관계를 유지해온 양측의 정상들이 만난 지 하루만에 아무런 사전 정지작업 없이 평화를 선언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6·15 선언의 ‘숨은 그림 찾기’는 지난 4월10일 남과 북이 동시에 발표한 정상회담 개최 합의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과 북은 이날 박지원 문화부장관과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이 4월8일 중국 베이징에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서명한 남북합의서를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특사회담에서 양측이 합의서를 서명하고 교환하는 장면의 사진에 배석자의 얼굴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두 특사만 나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명하다.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결정된 것은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특사회담에서가 아니라 국정원과 아태평화위가 세 차례에 걸쳐 접촉했던 비밀회담에서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고(故) 엄익준 전국정원 차장이 투병 막바지인 4월7일 “이제 내 할 일은 다했다”며 사직원을 낸 것으로도 확인된다. 이는 결국 4월7일 이전에 국정원과 아태측이 물밑에서 진행한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나중에 공개된 남북 특사회담은 양측 실무자들이 작성해 놓은 합의서를 박지원-송호경 두 사람이 서명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박지원장관이 공개했듯이 두 사람은 그 전 3월17일 상하이에서도 한 차례 비밀회담을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북한측이 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 동의 카드를 들고 나온 시점이었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최초로 남북한 양측이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가지고 극비회담을 가진 것은 3월9일 싱가포르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럽 순방 중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그 시점에 싱가포르에서는 국정원-아태 관계자들이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하는 비밀접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번에 걸쳐 진행된 싱가포르 비밀접촉에는 국정원의 김보현 5국장(대북전략국장), 서영교 단장과 아태의 송호경 부위원장, 황 철-권 민 참사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의 김보현 국장과 서영교 단장, 그리고 아태의 권 민 참사는 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6·3 차관급 비공식회담과 그 이후 6월말~7월초에 열린 차관급회담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당시 개설한 국정원-아태 비공개 채널의 연장선 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지난해 6월3일 열린 차관급 비공개 회담의 남측 대표는 김보현 국장, 손인교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부장, 윤정원 통일부 베이징 주재관 등이었고 북측 대표는 전금철 아태 부위원장, 강덕순 아태 부실장, 권 민 아태 참사 등이었다. 당시 ‘국무총리 특보’ 모자를 쓰고 베이징 비공개 회담에 참석했던 김보현 국장은 싱가포르 비밀회담 대표로 나선 데 이어 남북정상회담에도 수행원으로 참여해 정상회담 전략단의 평양 상황실장을 맡았다. 또 손인교 국장은 남북대화사무국장으로서 정상회담 준비접촉회담 대표로 참여한 데 이어 5월31일 정상회담 선발대 단장으로 평양에 들어가 회담 준비를 총괄했다. 한편 서영교 단장 또한 싱가포르 비밀회담 대표로 나선 데 이어 ‘통일부 국장’ 모자를 쓰고 정상회담 준비접촉 대표와 평양 선발대 부단장으로 참여했다.

    이런 사실은 싱가포르 비밀회담이 남북한이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을 시사해준다. 김보현 국장-서영교 단장은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4·8 베이징 특사회담의 합의서 서명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숨은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3·9 싱가포르 비밀회담은 김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이 비밀회담의 지휘 사령탑은 임동원 국정원장이었다. 김보현-서영교 두 사람은 현직 국정원 국장-단장이고 손인교 남북대화사무국장 또한 안기부 출신이다. 물론 북한측도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당초 북한측은 정치적인 부담이 큰 정상회담보다는 경제협력사업을 논의하기 위한 각료급회담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국정원은 당국자회담을 원하는 북한측의 의사를 간파하고 3월초쯤에 베이징의 아태 채널을 통해 이를 정상회담으로 전환하는 카드를 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북한측이었다. ‘로동신문’(3월6일자)이 ‘모략군이 끼여들 자리는 없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화를 상대방에 대한 모략공간으로 이용하려는 괴뢰정보원 패거리들의 개입부터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맹비난한 것은, 국정원이 정상회담을 제의한 의도와 배경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시간을 벌기 위한 떠보기’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사흘 뒤에 싱가포르에서 아태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고 거부했던 ‘괴뢰정보원 패거리’와 무릎을 맞대고 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아태 채널의 회담이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측은 3월14일 판문점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제안에서 “곧바로 정상회담 교섭을 시작하고 싶다. 단 교섭에는 국가정보원 관계자를 제외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북측이 그때까지 남북 비밀회담에 상대자로 나온 국가정보원이 아닌 다른 정부 부서 당국자(통일부)와 만나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교섭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측으로서도 통일부장관이 움직이는 것은 비밀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김대통령과 임동원 원장이 궁리 끝에 박지원 장관을 특사로 임명해 3월17일 상하이 비밀회담에 내보낸 것은 이런 양측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국정원의 북한정보 분석업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3월부터 우리측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 서명한 4월8일까지 북한측은 국정원의 뭍밑 접촉(개입)과 관련해서 중앙방송을 통해 세번 비방했다. 그러나 다른 두번의 비방과 달리 한번은 다른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이 겉으로는 ‘정보원(국정원) 해체’를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국정원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국정원-아태 뭍밑 접촉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대통령 특별보좌역’이라는 모자를 쓴 임동원 국정원장의 순안공항 ‘카메오 출연’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트릭’은 2박3일의 일정 동안 그의 역할이 조금씩 노출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방북 첫날 순안공항에 영접나온 김정일 위원장에게 남측 공식수행원들을 소개할 때 임동원 특보는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이헌재 재경부장관 등에 이어 중간쯤에 서 있었다. 그러나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순안공항을 떠나던 날 김위원장이 고별 악수를 나눌 때의 순서는 김대중 대통령, 임동원 국정원장, 박재규장관 등으로 공식수행원 중 1순위였다.

    이같은 극적인 자리 이동은 첫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용순 비서의 부탁으로 임특보가 남측 수행원들을 김위원장에게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다음날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확대정상회담에서부터 임특보는 김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이동했다. 김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회담장의 자리 배치는 ‘좌(左)동원 우(右)재규’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열린 2차 정상회담에서 김위원장은 ‘용순 동무’만을 배석시켰고 김대통령은 임동원 특보와 이기호-황원탁 수석을 배석시켰다. 그리고 이날 밤 11시20분 두 정상은 역사적인 서명 테이블에 공동선언의 산파역인 임특보와 ‘용순 동무’만을 배석시켰다. 서명이 끝난 뒤 김위원장은 임원장을 불러 귀엣말을 주고받은 뒤 잔에 가득 담긴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임동원 특보가 이 세기의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은 6월15일 김정일 위원장이 주최한 오찬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김위원장은 뜻밖에도 사복 차림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에게 고별사를 맡겼다. 김위원장은 이날 아침 국방위원회에서 휴전선의 대남 비방방송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고 오찬장에서 밝혔다. 전날 밤에 서명한 공동선언의 첫 실천을 의미하는 제스처였다. 남측으로서도 성의 표시가 필요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건승을 기원’하는 임동원 국정원장의 답사는 이런 가운데 나왔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날 처음으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임특보를 ‘임동원 국정원장’이라고 불렀다. 남한의 대북 공작을 총괄하는 국가 정보기관 책임자가 북한 최고 지도자의 건승을 기원하는 장면은 역사의 아이러니와 트릭을 담고 있다.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는 “오찬장에서 국정원장이 건배에 답사한 그림(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역사적인 큰 회담 뒤에는 반드시 이면이 있다. 그리고 대개는 이 이면의 이야기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크고 길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이면의 이야기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임동원 국정원장의 사전 방북설이다. 임원장이 지난 5월27일께 국장급 실무자 1, 2명을 동행하고 평양을 방문해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김용순 비서와 함께 남북정상회담의 일정과 의제, 그리고 공동선언에 담을 내용 등을 집중 논의하고 김정일위원장을 면담했다는 것이 이 스토리의 요지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확인해줄 수 없다”며 긍정도 부인도 않는 NCND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임원장의 사전 방북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에서 준비해간 원고는 김대통령의 만찬사까지였다. 그리고 김대통령이 낭독한 만찬사는 김위원장의 극진한 환대에 감사를 표하는 대목만을 현지에서 추가했을 뿐 대부분은 준비해간 원고대로였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제외한 공동선언의 뼈대가 이미 사전에 합의되었음을 의미한다.

    지난 3월9일 김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던 날 동시에 진행된 국정원-아태의 싱가포르 비밀 접촉에서부터 6·15 평양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막후에는 이런 ‘숨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숨은 그림’들의 실체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끈 관계자들에게 주어질 훈장에서 그 윤곽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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