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안 곤잘레스. 쿠바를 탈출할 때 같이 배에 탔던 엄마와 양아버지는 마이애미 해변을 눈앞에 두고 난파된 배와 함께 목숨을 잃었고, 엘리안은 나머지 생존자 두 명과 함께 가까스로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그리고 지금 그 엘리안은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미국과 쿠바의 치열한 신경전과, 미 공화-민주 양당이 펼치는 정치 싸움의 정점에 서 있다. 자유와 행복, 희망의 이름으로 시작된 한편의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가 냉엄한 국제 정치의 급류를 타면서 마침내 미국 국내 정치라는 현실주의파 조타수를 만난 셈이다. 최종 정박지가 어디가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엘리안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마이애미에 사는 종조부뻘 되는 친척이다. 쿠바의 친아버지는 당장 아들을 돌려보내라고 아우성이다. 마이애미의 친척은 안될 소리라고 반박한다. 여기까지는 ‘집안일’ 이다. 그러나 이 집안일은 곧 반카스트로 망명집단인 마이애미의 쿠바인 사회와 카스트로를 포함한 카스트로 지지자들간의 대립으로 비화됐다.
엘리안이 남 플로리다 해안에서 구조된 날은 지난해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11월25일)이었다.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엘리안을 돌려보내라는 시위가 계속됐고,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라도 하듯 12월6일은 때마침 엘리안의 생일이었다.
엘리안은 이날 마이애미와 쿠바에서 두 번 생일상을 받았다. 마이애미에서는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엘리안에게 생일 선물과 함께 영어와 스페인어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주었고, 쿠바에서는 엘리안의 학교에서 주인 없는 생일 잔치를 벌였다. 쿠바의 생일 잔치에는 카스트로가 직접 교실을 찾아와 쿠바 국기가 덮여 있는 엘리안의 빈 책상에서 엘리안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튿날, 엘리안은 미국 경관들의 삼엄한 경호에 둘러싸여 아동 심리학자의 진단을 받은 뒤 텔레비전 인터뷰를 했다. “미국에 있고 싶다”는 것이 엘리안의 말이었다. “엘리안을 돌려보내라”는 쿠바 시위대의 구호가 무색해졌다.
엘리안이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마침 미 의회는 휴회 기간이었고, 이 여섯살짜리 꼬마를 둘러싼 논란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안의 미국행은 처음부터 정치 쟁점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최근 들어 미 정가에서는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와 양국 관계 개선의 기미가 엿보였다. 공화당 지배하의 의회, 특히 상원의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렀다. 대 쿠바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던 클린턴으로서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러던 참에 엘리안이 미국 땅을 밟았고, 엘리안의 보호권이 현안으로 부각되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다시 껄끄러워진 것이다.
99년 12월12일. 미국은 가장 미국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엘리안에게 이틀간의 디즈니 월드 여행이라는 선물을 안긴 것이다. 이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입에서는 “이 꼬마는 정치적 축구공이 아니다”는 정치적인 발언이 흘러나왔다. 공화당 진영에서 엘리안의 쿠바행을 반대하면서 정치 쟁점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이었다.
아바나 주재 미국 관리들이 엘리안의 아버지를 만나고, 미국 이민국은 이 사건을 심사하기 시작했으며, 카스트로는 미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디즈니 월드를 동원한 것이야말로 “쿠바 국민에 대해 무례한 짓거리”라고 닦아세웠다. 12월25일 크리스마스. 엘리안은 자기 앞에 놓인 성탄절 선물꾸러미를 풀면서 쿠바의 아버지에게 국제전화를 건다. 이 장면이야말로 그때까지 전개된 엘리안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2000년 1월5일, 미 이민국은 엘리안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엘리안은 하루 전인 4일 마이애미에 있는 쿠바계 미국인 학교에 첫 등교를 했었다. 1월8일, 미 하원 공화당의 댄 버튼 의원은 미 의회 증언을 위해 엘리안을 소환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엘리안의 쿠바행에 제동을 걸고 나섰고, 재닛 리노 법무장관은 1월13일 엘리안은 쿠바의 아버지 곁으로 가야 한다고 맞섰다. 엘리안을 사이에 둔 공화-민주 양당의 줄다리기가 본격화된 것이다.
의회의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아예 의회 결의로 엘리안에게 미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까지도 구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방법으로 미 시민권을 받은 사람은 윈스턴 처칠, 마더 테레사, 17세기 영국인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민주당도 가만있지 않는다. 엘리안의 쿠바행이란 이민국의 결정이 나온 뒤 클린턴 대통령은 심사숙고 끝에 이민국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를 위해 수년간 공을 들여온 민주당의 찰스 랭글 의원(뉴욕)은 엘리안을 데리고 쿠바로 날아가 아버지 품에 돌려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곤란해진 것은 앨 고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마당에 엘리안의 쿠바행을 반대하는 쿠바인 사회의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안의 쿠바행을 지지하는 클린턴 행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마이애미의 쿠바인 지도자와 리노 법무장관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고육지책을 구사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엘리안 건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다. 민감한 사안에 자칫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표 날아가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대선 후보 출마자인 조지 W. 부시와 존 매케인 상원 의원조차도 이민국 결정에 비판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대놓고 큰소리를 치지는 못한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엘리안은 공화-민주 양당의 대립만 불러온 것이 아니다. 플로리다 쿠바인 사회의 반카스트로-반쿠바 운동이 연일 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자 이번에는 미국내 좌파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쿠바 망명인들이 끝없이 카스트로와 반목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쿠바를 혐오만 할 것이냐는 게 좌파들의 비난이고, 이에 맞서 우파들은 엘리안이 쿠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안다면, 그리고 엘리안의 엄마가 왜 목숨을 걸고 여섯살짜리 자식을 미국에 데려오려 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타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마이애미의 쿠바인 가운데 90%는 엘리안이 미국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다. 1960년대 초 쿠바에서는 무려 1만4000에 달하는 가정이 아이들을 홀로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지금까지 쿠바를 탈출해 미국 땅을 밟은 쿠바인은 100만명에 달한다.
쿠바인들의 미국 망명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안은 미 대통령선거의 해에, 그리고 미국과 쿠바의 관계 정상화가 추진되는 정치의 계절에, 그것도 여섯살의 나이로 홀로 미국 땅을 밟았다. 엘리안이 배로 건너온 플로리다 해협을 비행기를 타고 다시 건너게 될지, 아니면 미국 시민으로 다시 디즈니 월드 구경을 갈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