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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아나운서의 세계

‘자리’따라 울고 웃는 ‘방송의 꽃’

캐스팅 따라 수입 천차만별 … 치열한 생존 경쟁, 설 땅도 좁아져

‘자리’따라 울고 웃는 ‘방송의 꽃’

‘자리’따라 울고 웃는 ‘방송의 꽃’
황정민. 3개의 TV프로그램과 1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에서 ‘잘 나가는’ 여자 아나운서 중 한 명이다.

“지금 행운의 여신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있습니다. 행운의 여신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닝파트너’ 황정민이었습니다.”

1월6일 오전 8시58분, KBS의 라디오방송 ‘FM대행진’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새벽 5시30분부터 시작된 황정민 아나운서의 오전 일과는 마무리됐다.

이날 오후 내내 KBS-2TV ‘시네마 데이트’의 녹화작업을 한 황아나운서는 오후 6시20분 KBS신관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 50여분간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오후 9시까지 ‘뉴스투데이’ 준비 및 진행, 금요일마다 열리는 뉴스투데이 스태프들과의 저녁회식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댄스음악을 틀어주는 아침방송 때의 기분으로 ‘점잖은’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이 그녀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최근 뉴스투데이에서 ‘오락실의 DDR 열풍’ 기사를 보도할 때 생긴 일. 황아나운서는 기사 끝부분에 사전에 없던 멘트를 넣었다. “저는 주로 손님이 뜸한 아침시간을 이용합니다.”

그녀는 뉴스투데이의 출연자와 대담을 하다가 출연자가 재미있는 말을 하자 웃음을 참지 못해 책상 밑으로 누워 버린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시청자들에게 ‘히트’를 했다. 젊고 편안한 뉴스프로그램이라는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는 것.

‘솔직담백함, 열정, 지성, 끼…’ 황정민아나운서는 여성 아나운서의 전형적 이미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매일 매일 ‘커리어 우먼’의 삶을 완벽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성공한 모습만이 여성 아나운서의 전부일까. 사람들은 여성 아나운서를 ‘방송의 꽃’ 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연예인 못지 않은 ‘가십’의 소재로 삼아 무차별 공격을 가하기도 한다. 물론 여성 아나운서들 중에는 볼썽 사나운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 아나운서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일에 열정을 바친다. 그럼에도 여성 아나운서가 세인의 화젯거리가 되는 이유에 대해 한 현직 아나운서는 “최근 매우 각론적이고 사적인 일들이 여성 아나운서 사이에서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각됐다”고 말했다.

여성 아나운서는 과연 ‘신데렐라’인가 ‘파워우먼’인가.

20대 초반의 A양은 “방송국 아나운서시험 합격을 위해 2년 넘게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토플, 토익에서 고득점을 얻었고 국어, 상식, 논설을 꾸준히 준비했다. 카메라테스트 등 실기시험을 위해 200여만원을 들여 6개월 동안 방송아카데미에도 다녔다. A양은 드디어 지난해 11월 모방송국 아나운서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어렵게 실기-필기-2차실기시험을 통과했지만 그녀에겐 아직 3배수를 뽑는 최종면접이 남아 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KBS MBC SBS 등의 서울본사에 입사, 현재 활동중인 여성 아나운서는 60여명 정도. 한 방송아카데미 아나운서과정 담당자 김광주씨는 “여성 아나운서들은 ‘지-덕-체’를 겸비한 최고의 여성 재원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방송국에 들어온 여성 아나운서들 중 몇몇은 입사하자마자 깜짝 놀란다. ‘꿈’이 너무 빨리 실현되기 때문이다. 한 여성 아나운서는 그 과정을 방송프로그램의 제작시스템으로 설명했다.

“진행자 캐스팅은 해당 프로그램 PD와 아나운서실이 협의해 결정한다. 그러나 시청률 경쟁 때문에 캐스팅 주도권이 사실상 PD에게 넘어갔다. 정확한 언어구사, 충실한 내용전달, 진행기법의 노하우 등 아나운서로서의 능력보다 ‘TV에 먹히는 외모’가 더 중요시됐다. PD들이 선호하는 ‘갓 입사한 예쁘고 어린 여자 아나운서들’은 한정돼 있다. 이들에겐 교양이든 오락이든 뉴스든 장르 구별 없이 프로그램이 할당돼 정신없이 바쁘다. ‘뜨지’ 못한 아나운서에겐 라디오뉴스나 아나운서실 전화받기 등 뒤치다꺼리와 좌절뿐이다.”

아나운서가 ‘캐스팅을 받아야 일할 수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직업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SBS의 경우 아나운서 전원이 1년 연봉계약직이다. 캐스팅되는 프로그램 수에 따라 수입도 천차만별이다. TV뉴스프로그램은 한정돼 있으므로 자연 ‘외모 가꾸기’ ‘잡기개발’ ‘개인주의’ 바람이 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자 아나운서들에게 ‘탈모’는 요즘 ‘실직’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머리카락’을 지키기 위해 남자 아나운서들이 투자하는 돈과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 남자 아나운서는 말했다.

여자 아나운서들에게 외모 문제는 더 절실하다. 방송국 구내식당에선 여자 아나운서들이 ‘새가 모이를 먹듯’ 밥 먹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한 여자 아나운서는 “머리 만들기, 화장, 성형수술, 의상 구입, 몸매 가꾸기에 들어가는 돈은 일반적인 직장여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찬숙씨 등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여성 아나운서들의 ‘수명’은 불꽃처럼 짧다. ‘얼굴’로 발탁되었다가 바로 그 ‘얼굴’ 때문에 밀려나는 것이다. 한 30대 기혼여성 아나운서가 말하는 자신의 방송생활은 여성 아나운서의 보편적인 ‘일대기’를 보는 것 같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자마자 9시뉴스 등 간판 TV프로그램들이 내게 몰렸다. 그때는 중요한 프로그램을 도맡아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10여년이 되는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뭘 알고 방송을 했었던가. 설익은 말들을 마구 내뱉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방송이 무엇인지 알겠다.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 그런 프로그램들은 더 이상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기혼 여성 아나운서는 한국방송의 ‘가벼움’이 싫다고 말한다. “중년층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서도 여성아나운서가 기혼자라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방송이 끝나면 동료들로부터 ‘오늘 웃기더라’ ‘의상이 좋았어’라는 평을 받는다. 여성 아나운서도 무게 있고 격조가 있는 방송을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 잘 먹히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 아나운서 중 57세 정년을 채운 사람은 아직 없다. 현역 여성 아나운서 중 40세를 넘긴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여성 아나운서들은 입사 15년 내에 직장을 그만둔다. 한 방송국의 경우 기혼 여성 아나운서 8명 전원이 공부를 하거나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많은 여성 아나운서들이 정말 아쉬워하는 것은 ‘특화된 능력을 갖춘 대중적 여성방송인’이 양산될 수 없는 인력관리시스템이다. 전파 매체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여성 아나운서들의 설자리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다.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진행은 기자나 PD에게 내주었으며 교양-오락프로그램의 MC 자리는 연예인들과 경쟁해야 된다. 라디오뉴스 진행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피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KBS 한 교양프로그램 PD의 이야기를 통해 여자 아나운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여자 아나운서는 쓰고 싶지 않아요. 남자MC 섭외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지요. 남자들이 같이하려고 하지 않거든요. 망가져 줄 때는 확실히 망가져 줘야 프로그램이 뜨는데…. 아나운서들은 주춤거린단 말이야.”

10년만에 시들어 버리는 ‘방송의 꽃’이 되지 않기 위한 여성 아나운서의 자리찾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상반된 견해가 있다.

KBS 아나운서협의회장 강성곤 아나운서(숙명여대 겸임교수)는 전통적 아나운서상의 회복을 역설했다. 그는 “바른 언어 사용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 교양, 도덕성, 지적 능력, 전문 분야,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출 때 여성 아나운서들이 ‘롱런’하며 제대로 된 자기만의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강현두교수는 여성 아나운서의 적극적 변신을 주문한다. “다채널 텔 레비전시대엔 엄청나게 많은 출연자들이 ‘말’을 해대기 때문에 아나운서의 표준어는 거기에 묻힌다. 말하자면 ‘국어순화기능’만으론 아나운서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의미다.

지금 여성 아나운서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흥해 자신의 독특한 ‘퍼스낼리티’를 표출해 내야 한다. 한마디로 대중적 상품가치가 높은 유명 아나운서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도태를 막을 수 있고 바른 방송언어가 살아 남는다. 퍼스낼리티가 많아질수록 방송인프라는 풍부해진다. 그것이 바로 한국방송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인터뷰]SBS 유영미 아나운서

“방송 14년만에 내 길 찾았죠”


자신의 나이를 어디서나 당당히 밝히는 SBS 유영미 아나운서(38)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아나운서 생활 14년만에 비로소 자신이 평생 해나가야 할 방송의 본업을 찾았기 때문이다.

유영미 아나운서는 6년째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SBS 라디오프로그램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을 진행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와 재미, 노래를 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검버섯이 많이 생겨 고민하는 노인에겐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며느리와 싸운 시어미니에겐 화해의 편지를 읽어준다. 중간중간 50, 60년대 한국가요들을 노래에 얽힌 사연과 함께 소개해 노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방송을 통해 자신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노인이 유영미의 열성팬이다. 유영미 아나운서는 “누군가 한 명쯤은 노인의 어려움과 희망사항을 사회에 계속 알려야 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녀는 노인복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유아나운서는 3개월 전 SBS 오전프로그램인 ‘뉴스와 생활경제’를 끝으로 TV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에게 방송인으로서 새로운 목표가 세워진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여자 아나운서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겠다. 노인 여러분들과 보람있게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MC VJ 쇼호스트 … ‘변종 아나운서’ 봇물

다매체시대 영향 … 뉴스 맡는 아나운서는 한국-일본-독일뿐


MC, VJ, 쇼호스트, 캐스터, 앵커, 아나운서…. 모두 방송진행과 관련된 말들인데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아나운서 직종이 다양한 변종들을 생산해 내는 현상을 반영한다.

국내 현역 아나운서들은 아나운서(announcer)를 ‘방송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방송사 내 언어훈련을 받은 직원’으로 정의내린다. 따라서 방송국을 퇴사한 프리랜서나 언어훈련을 받지 않은 프로그램 진행자는 엄밀히 말해 아나운서가 아닌 셈이다. 아나운서에게 뉴스보도를 맡기는 방송시스템은 한국 일본 독일 정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강성곤 아나운서).

MC(Master of Ceremony), 앵커, 캐스터는 직종이 아닌 ‘역할‘의 개념이다. 일종의 ‘프로그램 진행자’라는 의미. 따라서 아나운서가 맡을 수도 있고 아니어도 관계없다.

음악-비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VJ나 홈쇼핑 채널의 상품소개자인 쇼호스트도 케이블TV 출현과 함께 등장한 변종 아나운서들. 국내에 70여명의 쇼호스트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9쇼핑’ 쇼호스트 홍나연씨는 “일정 정도 언어훈련을 받으며, 상품판매실적-경력-호감도 등 평가기준에 따라 최고 70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매체시대가 정착됨에 따라 전통적 개념의 아나운서는 점점 그 영역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0.01.20 218호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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