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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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피해자였다”

당시 특수요원 관리했던 공군예비역 최초 공개증언

  • 서해 실미도=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7-02-01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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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명 ‘오소리’. 임무는 김일성 암살. 작전 성공시는 사형취소 및 잔형면제, 그러나 실패시는 자폭할 것.

    통상 ‘오류동 정보부대’라고 불리던 공군 제7069부대 소속 실미도 파견부대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 실미도 부대의 공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 68년 청와대 앞까지 진격했던 김신조 일당의 부대명을 그대로 본따 중앙유격사령부 684특수교육대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그동안은 박정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설돼 극비로 운영됐다는 이유로 누구도 언급하기를 꺼렸던 부대였다. 이 특수부대의 실체가 최근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 응한 관련자들의 공개 증언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71년 8월23일 난동사건 당일,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6명의 기간사병 중 한명인 황석종씨(52)는 제대후 실미도 사건의 후유증으로 3년간이나 제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다. 황씨는 당시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을 맡았던 김순웅준위의 부관으로 일했고 사건 당일에는 매트리스 속에 숨은 상태에서 훈련병들에게 총격을 당했지만 등과 어깨, 두 군데에만 총상을 입고 극적으로 살아났다. 제대후 공무원생활을 시작했지만 늘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이를 안타깝게 본 주변에서 황씨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바닷가에서 굿판을 벌이기까지 했다.

    피의 살육 … 시신 살점도 못찾아

    이 날의 반란사건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황씨 이외에 한상구(당시 하사), 양동수, 안지근씨 등 6명. 이 중에는 보초를 서던 중 화장실에 갔다가 총소리를 듣고 반란을 직감해 분뇨 속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도 있었다.



    당시 반란 사건으로 현지에 근무하던 공군 하사관과 사병 등 모두 17명이 숨졌다. 3년 동안 이 황량한 무인도에서 벌어진 참극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훈련병들의 총격으로 숨진 사망자들은 대부분 시신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총격을 당했다.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황석종씨는 “당시 소대장을 맡았던 A중사의 시신에서는 살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국립 현충원에는 현재 이들 17명의 유해가 봉안돼 있다.

    다리 부상으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기 7개월 전인 71년 1월 실미도를 빠져 나온 이준영씨(51)는 반란사건 이전부터 이미 섬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3년 이상 섬에서 생활한 훈련병들은 이미 ‘이무기’가 되어가는데 새로 투입된 기간사병들은 현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간사병들의 인원을 늘려서라도 현지 분위기를 잡아 보려 했지만 이미 섬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씨의 증언대로라면 대북 침투라는 당초의 목적을 상실한 채 ‘버려진 부대’였던 실미도 부대에는 이미 비참한 최후를 예고하는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실미도사건 생존자들은 황해도 해주를 마주보는 서해상 ‘××도’에 이들 특수 요원을 열기구에 태워 북에 투입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운영됐던 사실도 새롭게 증언했다. 이 전진기지에는 통신요원 ×명이 상주하면서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개 증언에 나선 대부분의 관련 당사자들은 형편없는 급식상태와 자신들의 가혹한 훈련방식이 난동사건의 원인이었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자신들 역시 남북한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가 부여한 임무에 충실하다가 잔인하게 죽어간 피해자라는 것이다. 30년만에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찾은 관계자들은 연병장이며 내무반 등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마다 동료들의 넋을 달래는 소줏잔을 뿌리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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