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8월 제주도에서 일하고 있는 국토건설단. 1960년 제2공화국 장면 국무총리는 미취업 대학생과 실직자 구제를 목표로 국토건설본부를 창립해 직접 본부장을 맡고 장준하가 기획부장으로서 진두지휘했다. 국토건설본부는 5·16군사정변 이후 국토건설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온전히 5·16 이후 공화당 정권의 업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50년대 후반 이미 경제개발계획이 입안돼 있었으며 5·16 군사정부의 계획은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5·16 이전 민주당 신파가 집권했던 제2공화국 시기의 경제개발계획은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데, 사상계 지식인 그룹이 직접적인 관여를 했기 때문이다.
박태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50년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지는 경제개발계획론은 자유주의 경제이론에 근거하는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이며 사상계 그룹과 민주당 신파들이 이 이론을 주장한 대표적 진영이었다. 민주당 신파의 핵심이던 주요한 역시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 안창호의 핵심 측근이던 주요한이 실력양성론을 여전히 근대화의 기본 철학으로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박태균의 ‘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
30대 지식인들 장면 정부 참여
사상계 그룹의 리더 장준하는 자신의 생각을 정치를 통해 직접 현실화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오랜 기간 장준하와 함께했던 안병욱은 훗날 ‘사상계’를 만들던 시기를 회고하면서 “장준하 씨는 사상계를 자기가 이념하는 정치로 나아가는 매개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판단이 사실이라면, 장준하가 했다는 ‘나는 독립운동, 혁명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사상계를 만든다’ ‘나는 가정보다도 사상계를 더 사랑한다’ 같은 말들이 다소나마 이해된다.
그런데 장준하의 이런 꿈은 사실 사상계 그룹의 다른 핵심 멤버들과 갈등할 여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잡지 ‘사상계’가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는 1950년대 후반 편집위원회 3인방인 김성한, 안병욱, 김준엽이 구상했던 ‘사상계’의 진로는 일본 이와나미(岩波)를 모델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나미서점은 오랜 기간 일본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출판사로 일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 세대는 이와나미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모델을 한국에서도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안병욱은 말한다. “사상계를 한국의 이와나미처럼 만들고 싶었다. 일본의 이와나미 문화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사상계 문화를 키웠어야 했다.” ‘사상계’의 마지막 주간인 지명관의 회고를 참고하면, 1960년대 중반까지도 편집위원들의 이런 꿈은 포기되지 않았다.
어찌됐든, 사상계 그룹이 이후 한국 사회의 온갖 모습을 좌우할 정책 브레인들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장준하의 생각이 결과적으로 더 ‘현실에 가까운 것’이었을 수 있다.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서 후일 국무총리가 여럿 나왔다. 김상협, 현승종, 유창순 등이다. 초기 ‘사상’을 만들었던 서영훈조차도 오랜 시간이 지나 김대중 정부에서 집권당 대표가 되었다.
사상계 그룹의 장면 정부 참여를 이야기하기 전, 그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이승만 정부 시절 야당인 민주당의 구성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배경은 해방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서북 출신 우익 엘리트들은 이승만 세력, 한국민주당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서북 출신, 특히 흥사단계 인맥을 제거한다. 결국 서북 출신 인사들은 야당세력으로 밀려나 민주당 신파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다.
4·19혁명을 통한 자유당 정권의 붕괴가 특정 정치 지도자 그룹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 아니었음은 한국 현대사의 불행 중 하나일지 모른다.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기 야당이던 민주당에게 자연스럽게 권력을 ‘배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장면과 주요한 등 민주당 신파가 쉽게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1969년 4월 강원 태백산 지구 국토건설사업장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있는 대원들. 초기에는 미취업 대학생 구제가 목표였으나 61년 12월 이후 병역의무 미이행자들과 불량배들을 강제 징집하는 목적으로 변질됐다.
1960년 8월 20일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직후 장면 총리(왼쪽)와 윤보선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선배세대들을 중심으로 장면 정부가 성립하자 사상계 그룹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 있게 근대화 모델을 제시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사회 지식인층의 주요 어젠다(agenda)가 정치·경제·문화 전반의 근대화, ‘건설’이었음은 분명하다. 1961년, 4·19혁명 후 첫 3·1절을 맞이해 장준하는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어젠다를 요약했다.
“자유는 정치적 면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물질적 기반으로서 힘찬 경제적 건설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정신적 토대로서 국민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한다. 우리의 3·1 정신은 후진성 극복의 열의와 결부되어야 한다.”
후진성을 벗어나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자유의 경제적 확대’, 즉 경제 건설의 강조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4·19혁명과 함께 일차적으로 정치적 근대화, 즉 정치적 영역에서의 자유 확보가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고 그다음으로 요청되는 것은 경제적 근대화, 다시 말해 경제적 후진성의 극복이 된 것이다. 요컨대 장면의 제2공화국 성립과 함께 ‘비판자’가 아니라 ‘건설자’로서의 장준하가 등장했다. 장면 정부에서 장준하가 했던 활동을 살펴보자.
이만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상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제2공화국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했다. ‘사상계’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범문사’를 설립한 유익형도 초기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했다.1965년 2월 24일 정치정화법폐기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옛 민주당 인사들. 왼쪽부터 김영선, 양일동, 이철승. 김영선은 제2공화국 재무부 장관 시절 장준하가 주도한 국토건설사업을 적극 지원했다(왼쪽부터).
1962년 2월 3일 울산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가운데 경례하는 이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훗날 유경환 같은 장준하 측 인사들은 5·16 군사정부의 초기 경제개발계획이 제2공화국 시기 장준하의 계획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일까.
장준하는 평양 숭실중 재학 시절,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가 벌인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감동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경험은 장면 정부에 와서 지식인 중심의 농민계몽운동에 대한 꿈으로 나타났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에서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경제개발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열의를 쏟았던 것이 국토건설본부를 중심으로 한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그 기반 사업인 국토건설사업이 이렇게 진행됐다. 제2공화국의 집권 민주당은 이 국토건설사업을 제1차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의 실질적인 출발로 간주했다. 국토건설사업을 ‘민주당 정부의 운명을 건’ 사업이라고 했다.
국토건설본부의 핵심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사상계’ 사람들이었다. 장면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고 기획, 관리, 기술, 조사연구의 4개 부서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장준하는 핵심 조직인 기획부장을, 나머지 3개 부서장도 사상계 그룹의 인물들이 맡았다. 장준하 외에도 편집위원이던 신응균과 이만갑이 부서를 하나씩 책임졌고, 편집국의 유익형과 박경수도 각기 부장과 간사로 참여했다. 사상계 그룹을 국토건설본부의 핵심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당시 재무부 장관 김영선이었다.
1962년 10월 11일 경북 울릉군청을 시찰하고 나오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장준하는 경제개발계획이 실행되려면 가장 먼저, 전국 행정단위에서 그러한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요원들이 확보돼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국토건설본부에서 해야 할 최우선의 일이 국토건설요원 양성이었다. 국토건설본부는 국토건설요원 2066명을 공무원 신분으로 채용해 전국 읍·면 단위로 파견했다. 유상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국토건설요원 채용은 고등고시를 제외한다면 건국 이후 공무원 공개채용(공채)의 실질적인 효시였다. 그전까지 일반공무원 공채는 제1공화국 말 재무부에서 결원 보충으로 100여 명을 뽑은 것이 전부였다. 이 대한민국 최초의 공채 공무원은 군사정부에서도 신분을 보장받았다(유상수의 ‘제2공화국 시기 국토건설추진요원의 양성과 활동’).
5·16 세력,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재활용
비교적 최근 학계에서는 5·16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해, 군사정부가 장면 정부의 경제정책을 훔쳤다는 허동현의 주장에 이완범이 반박하는 등 논쟁이 있었다.
현대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연구자로 잘 알려진 박태균의 정리에 따르면, 실제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안은 1961년 5월 15일 내용이 확정됐는데, 바로 다음 날 5·16군사정변이 발발해 발표되지 못했다고 한다. 군사정부는 정변 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을 통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박태균은 이 계획안이 기본적으로 민주당 정부 경제개발계획안을 토대로 하여 최고회의안과 박정희 명의의 지침으로 기본 골간을 이루었다고 분석한다(박태균의 ‘원형과 변용’).
정말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이 장면 정권의 것을 베낀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 전략의 차이를 떠나 장면 정권이 표방하던 경제 제일주의를 5·16 세력도 이어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경제개발계획 자체가 대한민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가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했다. 아시아 국가의 계획은 대부분 1950년대에 시작했다. 인도는 1951년부터, 이집트는 1960년부터 그리고 사회주의권인 중국은 1952년, 심지어 북한도 1957년부터 시작했던 정책이었다.
1950년대 다른 신생국들의 경제개발계획을 사상계 그룹을 위시해 한국 지식인들은 이미 연구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한국 사회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장면 정부는 실행을 준비했으며 그 직전 단계까지 갔다. 장면 정부를 통해 자신의 원대한 꿈 하나를 실현해보려 했던 장준하의 계획은 5·16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5·16 쿠데타는 장준하 ‘개인’으로서도 하나의 좌절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