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한국의 초고속인터넷 시장에 최초로 커뮤니티 포털 개념을 도입한 프리챌의 창업주 전제완 사장. 현재 그는 유아짱의 대표로 복귀했다.
그러던 그가 1999년 벤처라는 모험을 시작했다. 1999년은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인터넷 열풍이 막 불기 시작한 시점이다. 프리챌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접근했다. 다른 업체가 정보를 중심으로 검색에 주력했던 반면 프리챌은 가장 먼저 오늘날의 소셜 웹과 비슷한 철학을 생각한 것이다.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에 강하게 어필하면서 2001년에는 회원 10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다.
2002년 하반기 프리챌은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됐다. 당시 닷컴 버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한국의 닷컴 회사도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포털에서 배너광고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검색광고조차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점이라, 직접적인 유료화를 하는 것 외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프리챌은 유료화라는 강수를 던졌다.
그러나 이후 프리챌은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2002년 12월 전 사장이 주식대금 가장납입 혐의로 전격 체포됐다. 이 사건과 함께 유료화를 통해 감수했던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면서 그를 따르던 최고의 인재들이 프리챌을 그만뒀다. 선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던 프리챌은 한 번도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 프리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프리챌이 남긴 인재는 한국 인터넷 산업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사장은 현재 인터넷 방송 및 전자상거래 플랫폼 서비스업체 유아짱 대표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유아짱에는 윤태중, 장규오 씨 등 삼성물산에 있을 때부터 전 사장과 동고동락해온 인물이 포진해 있다.
이확영 카카오톡 기술담당이사(CTO)는 프리챌을 나와 NHN 재팬에서 근무하다, 한게임 창업자인 김범수 사장과 현재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를 이끌고 있다. 싸이월드의 세계화를 재추진하는 SK커뮤니케이션즈 이태신 상무도 삼성물산에서부터 전 사장과 함께했던 인물이다. NHN의 마케팅 및 디자인을 담당하는 조수용 본부장은 프리챌의 디자인을 맡았던 인재. 넥슨의 자회사인 큐플레이 김정준 대표 역시 프리챌을 그만두고 넥슨에서 신사업전략을 담당하는 임원으로 활약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콘텐츠 관련 벤처기업인 포도트리의 이진수 대표도 프리챌 출신.
비록 프리챌이라는 텃밭은 사라졌지만, 이곳에서 자란 인재는 민들레 홀씨처럼 여러 기업으로 흘러들어가 자신만의 꽃을 피웠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인생의 불꽃을 태우는 벤처 1세대의 노력이 화려하게 꽃피기를 기대한다.
* 정지훈 교수는 의사이면서 IT 전문가란 이색적인 경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관동대 의과대 명지병원 융합의학과 교수이자 IT융합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