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은 원래 증조부인 효종의 영릉이 있다 천장한 초장지다.
영조는 휘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으로 숙종의 둘째 아들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소론(경종 지지)과 노론(영조 지지)의 당쟁 속에서 붕당정치의 폐해를 경험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붕당 대립의 완화와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한 정치 과제로 여기고 이를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탕평책은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해 붕당 간 대립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고자 만든 정책이었다. 영조는 먼저 붕당을 만드는 자는 영원히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힌 뒤,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 강경파를 몰아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했다.
그러나 노론 세력에 동조하던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은 영조와 그의 유일한 아들인 사도세자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과 무고를 일삼았다. 이로 인해 영조의 미움을 산 사도세자가 영조 38년(1762) 5월 21일 새벽 뒤주에 갇힌 지 여드레 만에 숨을 거두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의 정치적 신념이었던 탕평책이 결국 노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영조는 자신의 결정이 나라의 앞날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널리 알렸지만 후회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영조는 탕평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했다. 또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 간 결혼을 금지하고자 집집이 대문에 ‘동색금혼패’를 걸게 하는 등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어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군역의 의무를 대신해 바치는 베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했고, 지나친 형벌이나 악형을 금지하고 신문고를 부활해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고자 했다.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해 문물제도를 정비했고, 실사구시의 학문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의 안정을 찾았다.
노론에 동조하던 정순왕후 등이 이간질
원릉의 장명등. 원릉은 영조가 펴낸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으로 조선시대 후기 능제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영조는 원래 아버지 숙종과 자신을 왕으로 천거한 제3 계모 인원왕후의 능침이 있는 서오릉에 조강지처인 원비 정성왕후 서씨와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먼저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의 능역을 조성하면서 능침 오른쪽을 비워놓는 쌍릉 형식의 우허제(右虛制)로 터를 조영했다. 하지만 정조는 이 터 대신 지금의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영조는 8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영하거나 천장해 능제를 정비하고 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국조상례보편’을 펴냈다. 정조가 주도해서 만든 원릉은 조선시대 후기 능제의 최고로 꼽힌다. 영·정조 시대가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르네상스 시대로 평가받는 것을 원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릉 고석의 귀면.
정순왕후 김씨는 정비인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에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정순왕후는 경주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영조 21년에 태어나서 35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됐으나 소생을 얻지 못한 정순왕후는 평생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며 정치적 야심을 키웠다.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였던 정순왕후는 벽파를 대변하며 이들과 사도세자를 공격했고, 결국 영조가 아들을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킨 뒤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1 원릉의 문석인은 어깨가 좁고 부드러우며, 무석인은 위풍당당하다. 이 조각에서 그 시대의 정치, 사회, 신분제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2 원릉의 표석은 왕과 왕비의 것을 따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며, 하나는 고종 때 황제국으로 추존하면서 만든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영조 국상 시 상주였던 정조는 정순왕후를 이곳에 함께 모실 의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3 원릉의 명당수는 서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의 정치 생명도 끝났다. 정순왕후가 순조 5년(1805)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승하하자 원릉에 쌍릉으로 모셨다. 정순왕후의 능호를 경릉(景陵)으로 하고 현재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단릉으로 모시려 했으나 마땅한 자리를 잡지 못해 현재의 자리에 영조와 함께 모셨다. 정순왕후 발인날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원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만 이어졌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놓여 있다. 또 문석인 공간인 중계와 무석인 공간인 하계를 통합하고 높낮이의 등급을 두지 않았으며 장대석으로 경계도 하지 않았다. 즉 문인 공간과 무인 공간의 높낮이를 두지 않은 고려와 조선시대 통틀어 최초의 능원인 것이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이후부터 지속돼온 상설제도의 변화와 신분제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능은 중계와 하계를 같은 공간에 통합했다.
다른 능과는 달리 3개의 표석
장명등은 사각등 형식이고, 망주석의 세호가 동물 형상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의 것은 위를, 왼쪽의 것은 아래를 향한다. 이와 관련해 능침에 있던 혼백이 오른쪽 망주석으로 나가 능역 정원에서 놀다 다시 능침을 찾아올 때 왼쪽 망주석을 보고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중국 명청의 능역 입구에 패방(牌坊)을 만든 것과 비슷한 의미로 추정할 수 있다.
문석인은 대체로 어깨가 좁고 세장한 형태이며, 장중함보다 곱고 섬세한 느낌이다. 하지만 무석인은 위풍당당하다. 영조의 긴 통치와 왕권강화로 세도정치를 무력화한 때라 문인들의 자중함을 바랐던 희망과 문무세력의 균형, 견제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이 중계, 하계 공간의 통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원릉은 다른 능과 달리 3개 표석(비각)이 있다. 하나는 조영 당시 것으로 정조가 친필로 ‘조선국 영종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쓴 것이고, 하나는 고종이 황제국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선대 시호를 황제로 추존하며 ‘조선국 영조대왕원릉(朝鮮國英祖大王元陵)’이라 고쳐 쓴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정순왕후의 단독 표석이다. 일반적으로 왕비는 표석을 따로 세우지 않고 부왕의 표석 오른쪽에 나란히 쓰는데, 이곳은 표석을 따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아버지 정조가 싫어했고, 자신을 수렴청정한 계조모에 대한 순조의 홀대 때문일까? 아니면 정순왕후의 친정이었던 안동 김씨들이 펼친 세도정치의 산물일까 궁금하다.
영조는 정비 정성왕후나 계비 정순왕후 사이에 자식을 얻지 못했고, 후궁인 정빈 이씨에게서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弘陵)은 고양시 서오릉 안에 있으며, 불운한 사도세자는 1899년 장조(莊祖)로 추존돼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해서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1-1 융건릉 지구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