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증권 퇴직연금 컨퍼런스.
하지만 아직까지는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비교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퇴직연금의 적립금 비중이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퇴직연금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기업과 근로자의 인식도 떨어지는 게 사실. 특히 2005년 퇴직연금 도입과 함께 제정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은 퇴직연금을 활성화하는 데 미흡한 점이 많다. 이에 정부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2008년 11월 국회에 제출한 근퇴법 개정안도 여전히 계류 중이다.
그렇다면 퇴직연금이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고용노동부 임금복지과, 삼성생명 퇴직연금연구소,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KB국민은행 퇴직연금사업부, 보험연구원, 한국연금학회 등 퇴직연금 전문기관의 조언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퇴직연금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 우선 기업의 퇴직금제도가 건재한 상황에서 굳이 번거롭기만 한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근로자들도 퇴직연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굳이 도입을 주장하지 않는다. 특히 월급이 적은 상당수 중소기업은 매해 퇴직금을 정산해 근로자에게 일종의 보너스처럼 지급해왔기 때문에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면 회사의 부담이 커지는 것은 물론 근로자의 반발을 가져올 수 있다.
퇴직연금 도입이 중간정산 계기?
퇴직연금의 도입이 오히려 퇴직금 중간정산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정부가 퇴직연금 전환을 적극 권장하자, 여윳돈이 있는 기업들은 퇴직연금을 도입하되 기존에 쌓인 퇴직금은 중간정산해 근로자에게 나눠주고 앞으로 쌓이는 적립금에 한해서만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로자 역시 중간정산으로 얻어지는 당장의 목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손성동 연구실장은 “퇴직연금 도입이 퇴직금 중간정산의 계기가 된다면, 차라리 도입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비판했다.
퇴직연금제도의 유연성이 떨어져 근로자의 선택권이 제한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대다수 기업은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과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중 하나만 선택한다. 또 DC형을 택했을 때, 특정 퇴직연금사업자를 선정하면 근로자는 그 사업자의 상품밖에 선택할 수 없다. 물론 퇴직연금사업자 선정 시 노동조합 등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거쳤다고 해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근로자들은 DB형과 DC형 상품을 동시에 가입할 수 없다. 또 일부 퇴직연금사업자의 담당자는 “DC형 상품의 경우 안정성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주식 비중을 40% 이하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근로자가 자신의 성향에 맞게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퇴직연금 도입 과정에서 근로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도 문제다. 미래에셋 김동엽 은퇴교육센터장은 “시장의 논리만 앞세워 퇴직연금 도입을 서두르다 보니, 정작 퇴직연금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로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했다”며 “근로자 중심의 가입자 교육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상자기사 참조).
퇴직연금 활성화를 막는 법과 규제, 관습도 여전히 존재한다. 현재 근퇴법에 따르면 근로자의 퇴직연금 수급권이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100% 사외적립을 하는 DC형과 달리, DB형은 퇴직 충당금의 60%만 사외적립을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DB형도 100% 사외적립을 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제 역시 기존 퇴직금제도에 유리하게 돼 있다. 사내 퇴직충당금의 30%까지 손비로 인정하는 것이 단적인 예. 물론 2010년 세제개편안에는 퇴직연금 세제개선 내용이 일부 반영돼, 사내 퇴직충당금 손비 인정의 경우 현행 30%에서 매해 5%씩 감소해 2016년에는 폐지된다.
한 퇴직연금사업자의 담당자는 “기업이나 근로자가 지나치게 안전성 위주로 퇴직연금 상품을 선택하는 것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퇴직연금 상품 중 원리금보장 상품이 절대다수(89.6%)를 차지하는데, 특히 DB형은 원리금보장 상품 비중이 96.4%로 DC형(70.5%)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개인이 관리하는 DC형은 주식에 대한 직접투자가 불가능하고 채권혼합형 상품도 주식 비중을 제한하고 있지만, 기업이 관리하는 DB형은 그런 제한이 별로 없다. 이 담당자는 “하지만 기업 내 퇴직연금 담당자는 혹시 있을지 모를 원금 손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더욱 안전한 상품을 선택한다”고 귀띔했다.
퇴직연금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일단 2년여 국회에서 계류 중인 근퇴법 개정안부터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정안은 2009년 비정규직법과 노조법 등이 정치 쟁점화되면서 여야 간 대립구도가 형성됨에 따라 법안 심의 자체가 무기한 지연됐고, 각 금융권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입법이 경쟁적으로 제출되면서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최근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정부안이라도 통과시키자”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정부도 같은 입장이라 조만간 개정안 처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은 △퇴직금 중간정산 요건 강화 △신설기업의 퇴직연금 자동가입 △근로자의 DB형, DC형 동시 가입 허용 △퇴직연금 도입 시 근로자 대표 동의 절차 완화 △이직이나 퇴직 시 퇴직연금 급여를 지급받는 경우 개인형 퇴직연금으로 이전(55세 이후 수령할 수 있도록) △자영업자의 퇴직연금 가입 허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중간정산을 하기가 어려워져 퇴직금이 생활자금으로 소진되지 않고 노후자금으로 쌓일 수 있다. 그리고 신설기업은 자동으로 퇴직연금에 가입되는 것은 물론 기존 기업들도 퇴직연금을 더욱 손쉽게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또 퇴직연금의 일부는 DB형, 나머지는 DC형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자영업자들도 퇴직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세제혜택 등 강력한 유인책 필요
2010년 11월 22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국연금학회가 창립 총회 및 기념 세미나를 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도 퇴직연금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또 퇴직연금 하에서 이를 수령할 때 일시금으로 받을 수도 있고 연금으로 받을 수도 있는데, 일시금으로 수령할 때의 소득세에 비해 연금 소득세의 혜택이 거의 없다. KB국민은행 이명규 퇴직연금사업부 팀장은 “일시금보다는 연금으로 수령할 때 소득공제 확대 등의 세제혜택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퇴법 개정안에 따르면, 퇴직 일시금에 대한 소득공제율을 현행 45%에서 40%로 인하해 일시금 수령에 대한 세제혜택을 줄임으로써 연금 수령을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일시금 수령에 대한 혜택을 줄이는 것보단 연금 수령 혜택을 늘리는 방향이 더욱 바람직하다.
‘내 돈’이라는 주인의식 가져야
일시금이 아닌 연금 수령에 대한 일종의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실제로 퇴직연금 선진국에서는 퇴직급여를 무조건 연금으로 수령하게 하고, 불가피하게 일시금을 받을 경우 ‘벌금’을 물게 한다.
하지만 안정성을 위해 DC형 퇴직연금 상품에 주식 40% 이하 등 투자 부문의 제한을 두는 점에 대해선 전문가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주로 보험이나 은행권에서는 퇴직연금은 노후생활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 만큼 안전성을 위해 현재 정도의 제한을 두는 게 좋다고 보는 반면, 증권계에서는 제한을 풀어 근로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찌 됐든 근로자 스스로가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이고 ‘내 돈’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동엽 센터장은 “교육을 다녀보면 최근 들어 연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퇴직연금’만큼은 뜨거운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 본인이 아닌 회사가 금액을 납입하기 때문에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로자 스스로가 관심과 주인의식을 가져야 기업도, 퇴직연금사업자도, 정부도 근로자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맞춤형 교육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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