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은 적립식 투자를 지킬 수 있어 ‘수익과 안정성\'’모두를 잡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안정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퇴직급여지만 정 부장은 ‘수익 극대화’란 원칙 아래 M증권사를 선택했다. 이어 주식 비중을 최대한도로 설정한 상품(국내 주식 40%, 국내 채권 60% 분산투자)에 가입했다. 매달 꾸준히 들어간 돈만 평균 50만 원. 4년간 받아든 성적표는 만족스러웠다. 2400만 원의 납입금이 이제 2657만 원이 됐다. 연평균 수익률로 환산하면 10.71%.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곤두박질쳤던 주가를 고려하면 그가 퇴직연금에서 거둔 수익률은 눈부실 정도다.
4년간 꾸준하게 부어 연 10.71% 수익
정 부장이 DB형을 택했다면 그가 받게 될 퇴직급여 규모는 ‘월평균 임금×근속연수’로 사전에 정해진다. 이때 퇴직 적립금의 운용으로 거둔 수익은 회사와 외부사업자의 계약으로 어떻게 나눌지 결정되며, 근로자가 받는 퇴직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결국 월평균 임금이 오른 만큼 DB형의 수익률이 올라갈 따름이다. A회사의 연간 평균급여 상승률이 5% 내외이므로 DB형에서 거둔 수익률 역시 5% 내외다.
수익률만 놓고 보면 DB형은 기존의 퇴직금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기존 퇴직금제도에선 실제로는 적립돼 있지 않고 회계장부상으로만 적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근로자의 수급권 보장이 취약했다. 더군다나 중간정산이 잦아 노후대비라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한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비록 수익률은 같을지 몰라도 DB형을 택하는 것이 근로자 수급권 보장이란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
만약 정 부장이 매달 평균 50만 원의 여윳돈을 퇴직연금이 아닌 다른 금융상품에 투자했다면 어땠을까? 먼저 정기예금과 정기적금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예금 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마이너스 금리’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2010년 1월 설정된 우리은행 ‘111 정기예금’은 우리은행이 창립 111주년을 맞아 내놓은 18개월 정기예금이다. 이 상품의 만기일시지급식 연평균 금리는 3.7%에 불과하다. 10월 4.1%로 높아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다.
낮은 금리가 마음에 걸린다면 펀드에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최근 주가가 대세 상승을 이어가면서 펀드수익률 역시 고공 행진하고 있다. 한 달 수익률만 10%대에 이르며 1년 수익률은 무려 50%에 육박한다. 2006년 6월 19일 설정된 메리츠자산운용의 ‘메리츠e-일등기업증권투자신탁’은 정 부장이 퇴직연금에 가입할 때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상품이다. 메리츠e-일등기업증권투자신탁의 3년 수익률은 20.06%. 매달 50만 원씩 3년간 투자했다면 약 361만 원의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세 가지 방법을 비교해봤을 때 정 부장이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것은 펀드 투자다. 지난 3~4년간 수익률을 비교하면 펀드가 정기예금보다 4배, 퇴직연금보다 2배가량 높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노후생활에 대비하기 위한 퇴직자금이란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금융당국은 퇴직연금의 안정성을 중시한다. 주식 비중도 40% 이하로 묶어놓아 경기 변동에 크게 상관없이 일정한 수익을 올리도록 하고 있다. 안정성을 고려한다면 퇴직연금이 거둔 수익률은 결코 나쁘지 않은 셈이다.
정 부장이 퇴직연금에서 10.71%란 비교적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3년 이상 장기투자’라는 적립식 투자의 제1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퇴직연금도 적립식 펀드처럼 매달 일정 금액을 납입하는 일종의 적립식 투자다. 적립식 투자는 평균 매입단가를 하락시켜 위험자산에 대한 기대수익률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소액 투자가 가능하며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 덕분에 장기간 투자할 경우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이런 적립식 투자는 적립 기간이 길수록 운용 적립금이 크게 증가해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재테크 전문가들은 높은 수익률을 올리려면 최소한 3년 이상 장기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 투자자가 최적의 투자 시기와 최고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으므로 매달 정해진 날에 일정 금액을 장기 투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준강제화 흔들림 없이 지속 적립
하지만 경기가 침체해 주가가 하락하면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정 부장 역시 펀드 투자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바 있다. 2007년 초 정 부장은 해외주식형 펀드에 가입했다. 천연자원 주식에 60% 이상을 투자하는 모투자신탁에 대부분을 투자하는 이 펀드는 가입 당시만 해도 당장 높은 수익을 올려줄 것 같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한때 -40%까지 수익률이 내려갔다. 보고 또 봐도 수익률은 떨어지기만 할 뿐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매달 적립하기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는 원칙은 알지만 속절없이 떨어지는 수익률에 결국 마음이 흔들렸다. 정 부장은 2009년 초 수익률이 -20% 후반쯤으로 회복됐을 때 해당 펀드를 환매했다. 원금을 지키진 못했지만 손절매를 했다며 애써 자신을 달랬건만, 요즘 그 펀드가 정 부장을 두 번 죽이고 있다. 현재 그 펀드의 3년 수익률은 -16.63%로 여전히 마이너스다. 하지만 최근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펀드의 3개월 수익률이 26.70%에 이르고 1년 수익률도 16.10%로 시중금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만일 눈 딱 감고 계속 펀드에 납입했다면 지금쯤 정 부장은 손해 본 것을 넘어 상당한 수익을 얻었을 것이다.
퇴직연금은 준(準)강제화돼 있기 때문에 경기 상황에 상관없이 매달 일정 금액이 적립된다. 펀드는 시장의 움직임에 따라 자금 쏠림이 심하지만, 퇴직연금은 한번 상품을 정하면 쉽사리 바꾸지 않기에 시장의 움직임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당장은 경기 침체로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투자를 할 수 있는 것. 정 부장이 4년간 퇴직연금에서 거둔 연평균 수익률은 10.71%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4.5% 수준까지 하락했다. 일반 적립식 펀드였다면 해외주식형 펀드의 사례처럼 환매를 고려했겠지만, 노후에 꺼내 쓸 돈이란 생각에 장기로 묻어두기로 한 것이 주효했다. 정 부장은 “주가가 회복되면서 그동안의 손실이 상쇄되고 상당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정 부장이 가입한 퇴직연금 상품은 국내 주식의 비중이 40%에 이른다. 정 부장은 “당분간 주식시장이 호황을 이어갈 것이라 보기 때문에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조절한 계획은 없다”며 “경기 상황에 따라 주식 비중을 조절할 수 있는 DC형 상품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금융전문가들은 “앞으로는 퇴직연금도 운용성과에 따라 퇴직급여가 달라지는 DC형이 대세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미래에셋증권 박상준 퇴직연금자산운용컨설팅팀 차장은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만 5년이 된 지금 아직 결과를 평가하기엔 이르지만 펀드를 통한 장기·적립식 투자, 우량 주식, 채권 분산투자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