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형, DC형을 두고 고민하던 기자에게 퇴직연금 전문가의 친절한 상담은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회사가 퇴직연금제도를 택하면 너도 자동가입이야. 남 일이 아니니 잘 알아봐라.”
당장 사내 퇴직연금 담당자에게 문의해 기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했다. 입사일이 만 1년이 지나 퇴직금이 발생했기에 당연히 퇴직연금에 가입됐다. 동아일보사는 확정급여(DB)형, 확정기여(DC)형 모두 도입했다. DB형은 3개 사업자가, DC형은 2개 사업자가 담당한다. 퇴직연금 담당자는 “1년에 한 번씩 퇴직연금과 관련해 교육한다”고 했지만 퇴직연금을 더 알고 싶은 기자에게는 부족했다. 직접 나서서 ‘내게 맞는 퇴직연금제도’를 찾아보기로 했다.
DB형은 회사가 책임지고 운영을 하니 기자의 선택 밖이다. 하지만 근로자가 직접 어떻게 운용할지 결정하는 DC형을 선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운용사가 퇴직연금을 담당하는지, 어떤 상품에 가입할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일단 기자는 DC형을 담당하는 운용사 중 KB국민은행을 택하기로 했다. 급여계좌를 둔 주거래은행이라 퇴직연금을 함께 관리하기가 편리하기 때문.
투자 성향이면 처음부터 DC형 노려볼 만
DB형과 DC형을 두고 고민하던 기자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국민은행 퇴직연금사업부를 찾았다. 퇴직연금사업부 서유진 대리는 “DB형과 DC형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모든 회사가 두 제도를 동시에 도입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준 회사에 감사한 것도 잠시, 이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서 대리는 기자의 입사 시기, 연봉, 예상 근속연수, 임금상승률 등을 물었다. 처음으로 돈주머니를 공개하자니 쑥스러웠지만, 알맞은 퇴직연금을 고르려면 낱낱이 밝혀야 했다. 이어서 투자성향 분석에 들어갔다. 투자 원금 중 일부 손실도 감수할 수 있고, 금융상품의 차이도 어느 정도 구별하는 기자에게는 ‘적극투자형’ 진단이 내려졌다. 이 경우 DB형보다 DC형을 노려볼 만했다.
서 대리는 “임금상승률이 높은 입사 초기엔 DB형에 가입한 뒤 상승률이 둔화하는 구간에서 DC형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투자 의지가 강하고 관심이 많다면 처음부터 DC형을 노려볼 만하다”고 권했다. 흔히 ‘입사 초기=DB형’을 염두에 두지만, 입사 초 주식투자 비중이 높은 DC형에 가입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채권투자 비중을 높이는 방식도 안정과 수익 두 마리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할 만하다. 특히 입사 초에는 투자에 실패해도 손실을 만회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기자의 향후 5년간 예상 임금상승률은 약 5%다. KB국민은행이 DC형에서 거둔 평균수익률이 5.9%에 이르니 ‘해볼 만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회사의 퇴직금 납입주기가 월 단위라 적립식 펀드처럼 운용할 수 있기에 위험부담도 덜 수 있다. 하지만 덜컥 DC형을 선택하자니 오를 대로 오른 주식시장에서 이익을 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런 기자에게 서 대리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대안을 제시했다. 주식시장이 상중가인 점을 고려해 돈을 유동성 대기자금이나 단기예금에 넣어두고 추이를 살핀 뒤, 나중에 채권혼합형에 투자할 것을 추천했다. DC형 가입자는 단기금융형, 채권형, 채권혼합형(주식 비중 40% 이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채권혼합형에도 성장주 투자형, 가치주 투자형, 배당형, 인덱스형, 해외투자형 등이 있는데 운용사마다 주특기가 있으니 이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결국 기자는 주식과 채권에 분산투자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수익성을 추구하는 채권혼합형에 가입하기로 했다. KB국민은행이 전국 모든 지점에 전문 퇴직연금 상담사를 둔 만큼 꾸준히 문의, 관리하면 ‘리스크’는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직장인 대부분은 여전히 DB형을 선택한다. 내년 1월에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할 예정인 한 해운회사의 정모(28) 씨도 DB형을 택했다. 여러 퇴직연금 운용사가 자사의 DC형 퇴직연금 상품의 장점을 홍보했지만 정씨와 동기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정씨는 “임금상승률에도 충분히 만족한다. DC형을 잠시 고민했지만 주변에서 DB형으로 가는 분위기라 관두었다”고 말했다. 정씨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DB형에서 DC형으로 한 번 옮기면 다시 DB형으로 돌리기가 어렵기 때문. 미래에셋 채형석 퇴직연금지원팀 팀장은 “퇴직연금은 처음 선택이 중요하다. 보통 DB형을 택하지만,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할 계획이라면 단기간 수익률 변동을 시간이 상쇄해주므로 DC형도 고려할 만하다. 앞으로는 DC형이 대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년이 가까워오는 직원들에겐 DC가 대세
정년이 가까워 임금인상분이 크지 않은 직원은 DC형이 유리하다. 중견기업 A사의 박모(48) 부장은 사내에서 ‘DC 전도사’로 불릴 만큼 DC형 장점 알리기에 열심이다. 박 부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한국경제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면 DC형이 최선이다. 내 말 듣고 DC형에 가입한 부하직원들이 훗날 고맙다며 점심을 대접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부장은 평소 금융시장에 관심이 많고 공부도 착실히 해왔다. 이런 박 부장에게는 수동적으로 퇴직금이 결정되는 DB형보다 자신의 운용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DC형이 입맛에 맞다.
하지만 자칫 공격적으로 투자하다 쪽박 찰 일은 없을까. 박 부장은 “퇴직연금 주식투자 비율이 최대 40% 이하로 고정돼서 손실에 대한 불안감도 크게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추락했지만 다시 회복한 증권시장도 그에게 믿음을 준다. 박 부장은 2006년 중순 가입해 2009년 12월 기준으로 연간 약 600만 원의 평가이익을 얻었다. 그는 오히려 퇴직연금제도 도입이 늦은 것이 안타까울 뿐.
강판 생산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49) 부장도 DC형을 선택해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 김 부장은 2008년 10월 말 DC형에 가입했다. 당시 금융위기 직후라 주식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극에 달했고, 주식시장도 폭락했지만 오히려 김 부장에게는 기회였다. 1992년 입사해 쌓아놓은 퇴직금 3억 원 전부를 주식 비중 40% 상한선을 채워 인덱스펀드에 투자했다. 코스피지수가 100% 오른 만큼 수익이 대박 난 것이다. 아직 퇴직금을 손에 쥐지 않았지만 김 부장은 배가 부르다. 김 부장은 “앞으로 공부도 꾸준히 하면서 위험자산 비중을 줄이고 안전자산을 늘리는 등 비중을 조절해갈 것”이라고 했다.
박 부장, 김 부장처럼 투자에 적극적이라면 가입자 부담금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DC형에 가입한 근로자는 회사에서 납입해주는 부담금 외에 개인의 여유자금도 납입할 수 있다. 가입자 부담금은 소득공제에도 도움이 된다. 부담금을 납입하고 운용할 때는 세금을 내지 않고, 퇴직금 받을 때 내면 된다. 적립 운용 단계에서 이자소득세가 붙지 않고 수령 시 퇴직소득세, 연금소득세만 내기에 근로자에게는 이익이다.
연봉제를 실시하거나 중소기업 규모의 회사 직원들에게도 DC형이 유리하다. DC형은 퇴직금 전부를 회사 밖에 적립하기에 회사 부도 등 최악의 상황에도 퇴직금을 모두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DB형은 회사가 부도나면 100% 보장받지 못한다. 2009년 말 체불 퇴직금이 약 4696억 원이니 무시할 수치가 아니다.
이직이 잦다면 IRA 강력 추천
퇴직연금 전문가들은 이직이 잦은 업종 근로자에게 개인퇴직계좌(IRA)를 추천한다. IRA에 가입한 근로자는 퇴직 또는 이직 때 받은 퇴직금을 IRA 계좌에 적립해 운용한 뒤 55세가 되면 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박모(40) 팀장은 2008년 7월만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이 나온다. 당시 박 팀장은 11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회사로 옮겼다. 당시 손에 쥔 퇴직금이 9000여만 원. 일부를 대출 갚는 데 쓴 뒤 대부분은 한 통신회사에 투자했다. 하지만 합병 차익이 예상됐던 통신회사의 주식은 폭락했고 현재까지 회복이 안 됐다. 박 팀장은 “퇴직금을 받았을 때 80%는 IRA에 넣고 20%만 주식투자를 해도 충분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후회했다.
박 팀장처럼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은 뒤 생활자금, 투자 손실 등으로 소진해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이 6.2년에 불과한 것을 고려할 때 퇴직금 과세시점을 은퇴 때까지 미룰 수 있는 IRA의 장점은 더 눈여겨볼 만하다.
퇴직연금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은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모 퇴직연금 운용사 직원 이모 씨는 “직접 퇴직연금을 운용하지만 퇴직연금은 공부하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내가 가입한 퇴직연금 운용사도 설명을 부실하게 했다. 회사가 내주는 돈이 아니라 내 돈이다 생각하고 관심을 가질 때 노후대비를 훌륭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운용사는 저마다 장점과 수익률을 강조하지만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김 부장의 웃음도, 박 팀장의 울음도 경제 여건이나 시장환경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자신이 가입한 상품이 무엇인지, 수익은 얼마나 나는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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