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방해하면 너의 401(k) 적립금액을 0달러로 만들어버리겠어.”
초고령화 사회 닥쳤는데 노후준비는 전무
영화의 모티프가 됐던 401(k)은 미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퇴직연금 플랜이다. 1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퇴직연금시장 규모는 약 10조600억 달러로 전체 은퇴자산시장의 65%가량을 차지한다. 근로자가 401(k) 플랜에 연봉의 1%까지 부담금을 납입하면 회사는 근로자 납입금의 100%까지 근로자의 401(k) 계좌에 넣어준다. 미국의 근로자들은 직장을 옮기더라도 퇴직연금 적립금을 찾지 않고 개인퇴직계좌(Individual Retirement Account·IRA)에 적립할 만큼 퇴직연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런 퇴직연금을 0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니, 맥클레인 형사로서는 악당들의 경고가 그 어떤 위협보다 공포스러웠을지 모른다.
맥클레인 형사가 자나 깨나 걱정했던 노후대책 마련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출산은 줄고, 노인인구는 늘어나면서 ‘저출산 고령화’가 더는 미룰 수 없는 현안이 됐다. 특히 한국은 2000년에 이미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7.2%를 초과하면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이런 추세라면 2026년에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한국인들의 노후생활 준비는 미미한 수준이다. 통계청의 ‘2010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노후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는 ‘준비할 능력이 없음’이 54.4%로 절반을 넘었고 ‘자녀에게 의탁할 계획’이 39.5%, ‘앞으로 준비할 계획’이 3.5%였다. ‘노후준비가 돼 있다’는 응답자의 노후준비 방법에선 국민연금이 29.6%로 가장 많았고, ‘예금·적금’(28.0%)이 뒤를 이었다. 기타 공적 연금 11.5%, 사적 연금은 11.5%였으며 퇴직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4.1%에 그쳤다.
같은 조사에서 고령자가 겪는 가장 큰 문제로 응답자의 41.4%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꼽았을 만큼 노후준비 부족으로 인한 노인 빈곤층 양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 정부는 ‘연금의 3층 구조체계’를 확립해 노후생활을 보장한다는 방침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민연금이 1층 연금으로서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회사 또는 근로자가 운영하는 퇴직연금이 2층 연금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뒷받침한다. 여기에 금융기관이 운영하는 개인연금에 자유롭게 가입함으로써 다중으로 노후소득을 보장한다는 복안이다.
퇴직연금은 연금 3층 구조체계의 허리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퇴직연금이란 매달 일정액을 특정 금융기관에 맡긴 뒤 그 운영성과를 퇴직 후 연금 형태로 받는 제도를 말한다. 퇴직연금은 크게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이 있다. 확정급여(Defined Benefit Plan·DB)형은 사전에 결정한 연금 지급 공식에 따라 연금이 지급되는 것으로 자신의 연금수급액이 미리 정해진다. 확정기여(Defined Contribution Plan·DC)형은 사전에 연금갹출액을 확정하는 반면, 연금수급액은 갹출금의 적립 수준과 운영성과에 따라 달라진다(36페이지 참조).
‘수급권 보장 강화’ 퇴직연금 부상
올해 말 퇴직보험과 퇴직신탁의 법적효력이 만료된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기업들이 중간정산을 하지 않고 퇴직연금으로 갈아타도록 기업을 상대로 퇴직연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국민연금 40%, 퇴직연금 20%, 개인연금 10%로 은퇴 전 소득의 70% 수준에 소득대체율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따르면 2009년 12월 수급자가 받은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12.8~25.5%로 10년 가입자의 경우 15.3%, 19년 가입자는 24.6% 정도가 된다. 또한 보험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퇴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25년 가입 시 15.1%, 35년 가입 시 22% 정도가 된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면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약 48%로, 적정 소득대체율 70%를 달성하기 위해선 나머지 22%를 개인연금으로 준비해야 한다. 만약 퇴직연금을 가입하지 않은 경우라면 개인연금으로 무려 47%를 채워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정부 재정 악화가 세계적인 이슈로 제기되는 상황에서 공적 연금인 국민연금을 늘리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국민연금 수급률을 낮추는 추세다. 그렇다고 개인들이 현재 지출을 크게 줄이고 개인연금 가입을 무한정 늘리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매달 일정액을 맡겨 그 운영수익으로 근로자의 노후소득을 축적하는 퇴직연금제도로의 귀결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세계 각국에서 퇴직연금의 준(準)강제화를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2년 퇴직연금을 강제화한 호주는 처음엔 소득의 3%를 강제로 쌓게 했고 이후 1998년 6%, 2001년 9%로 높였다. 일본 역시 공적연금을 보완하고 근로자의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안정장치로 퇴직연금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기존의 퇴직금제도와 비교해서도 퇴직연금은 노후생활 보장에 부합하는 제도다. 퇴직금은 일반적으로 퇴직 시의 평균임금 30일치를 기준으로 여기에 근속연수를 곱해 산정한다. 이런 퇴직금이 노후생활 자금이란 본연의 역할을 다하려면 ‘퇴직금에 대한 근로자의 수급권’이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퇴직금은 체불되는 경우가 많아 근로자의 수급권 보장이 미흡했다. 실제 퇴직금 체불액은 2007년 2896억 원, 2008년 3563억 원, 2009년 4696억 원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인다. 고용노동부 임금복지과 관계자는 “퇴직금 지급을 위한 재원이 별도로 적립돼 있지 않고 기업 운영경비 등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이 갑자기 도산하면 퇴직금을 전액 지급받지 못하고 체불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퇴직보험 종료 퇴직연금 급성장 기대
1998년 퇴직보험, 2000년 퇴직신탁이 차례로 도입돼 금융기관에 예치된 퇴직금 재원만큼 근로자의 수급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됐지만, 이들 제도 역시 근로자의 수급권 및 요구를 100% 충족시킬 수 없었다. 더군다나 1997년 퇴직금 중간정산제도가 도입되면서 상당수 기업이 퇴직금 누진제의 부담을 덜고자 중간정산을 실시했고, 목돈을 손에 쥔 근로자들은 노후대비가 아닌 생활비, 채무변제 등 급한 용도로 다 써버렸다.
반면 퇴직연금은 회사가 계약을 맺은 퇴직연금사업자 계좌에 적립금을 쌓았다가 일정 요건(10년 납입·55세 이상)에 이르면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지급받아 쓸 수 있어 안정적인 노후설계가 가능하다. 또한 기존의 퇴직금제도보다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덕배 전문연구위원은 “퇴직연금은 퇴직연봉제, 성과주의 임금제도, 임금피크제 등 최근 각광받고 있는 유연한 인사관리제도에 적합하다”며 “근로자 역시 직장을 옮기더라도 퇴직금을 개인퇴직계좌를 통해 은퇴할 때까지 관리, 운용할 수 있어 안정적인 노후생활자금 보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장점에 힘입어 국내 퇴직연금시장은 5년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2007년 말 적립금액 2조7567억 원, 가입자 53만8000여 명이었지만, 2010년 9월 말 현재 국내 퇴직연금사업자(은행·보험·증권) 53곳이 운용하는 적립금 규모는 20조 원을 돌파했고, 가입자 수는 183만 7445명으로 불과 3년 만에 적립금액은 6배, 가입자는 4배 가까이 급증했다.
2005년 12월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서 신규가입이 중단된 퇴직보험과 퇴직신탁의 법적 효력이 2010년 말로 종료된다. 연말까지 퇴직보험과 퇴직신탁을 퇴직연금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중간정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과 보험사에 쌓여 있던 적립금이 대거 퇴직연금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역시 퇴직보험을 해약하게 되는 기업들을 상대로 중간정산을 하지 말고 퇴직연금으로 갈아타도록 독려한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2010년 말까지 퇴직연금시장은 30조 원대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퇴직연금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