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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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세계화란 다 그런 거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한국 태권도 최악의 부진 … 경기력 저하보다는 세계화 흐름

  • 신진우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niceshin@donga.com

    입력2010-11-29 1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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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0일 오후 중국 광저우 광둥체육관.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남자 54kg급 결승전 종료 신호가 울리자 한국의 김성호는 매트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국 선수에게 패한 그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긴 코칭스태프도 마찬가지. 류병관 태권도 대표팀 감독은 “이젠 만만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살얼음판 승부”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태권도 마지막 경기가 열린 이날 한국은 은메달 2개를 따는 데 그쳤다. 나흘 동안 벌어진 경기에서 한국이 수확한 금메달은 4개(은4, 동4). 16체급 가운데 12체급에 선수를 파견해 8개의 금메달을 목표로 했지만 딱 절반의 성과를 거뒀다.

    메달 독식? 예전 같지 않아

    태권도가 아시안게임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건 1986년 서울 대회. 한국은 남자부 8체급 경기만 열린 이 대회에서 7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이후에도 독주는 계속됐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땐 출전한 4체급 모두 금메달을 땄고, 여자부 경기가 시작된 1998년 대회 땐 12체급에 나서 11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다. 2002년 부산 대회 때도 금메달 12개로 남녀 모두 적수가 없었고, 2006년 도하 대회 때도 9개를 따내며 기대만큼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번 광저우 대회에서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남녀 모두 종합 1위 자리를 내줬다. 남자(금2, 은3)는 이란(금3, 동1)에 밀렸고 여자(금2, 은2, 동2)는 중국(금4, 은1)에 무릎을 꿇었다.

    국내 선발전만 거치면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라던 태권도가 예전 같지 않다. 2007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남녀 동반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 대회 역대 최악의 성적(금4, 은4, 동4)을 거뒀다. 특히 남자부는 금메달 1개라는 충격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던 모습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태권도 위기론이 나온다. 1등이란 자리에 안주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비판과 함께 종주국 자존심이 무너졌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

    사실 현실에 안주해 어느 정도 자만한 측면도 있다. 각종 세계 대회에 가보면 각국 선수들은 캠코더로 우리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찍느라 분주하다. 정보 수집에 그만큼 열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우린 그런 거 안 찍는다. 내 경기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며 심드렁한 모습이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도마에 오른 전자호구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에 사용된 전자호구는 한국 선수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제품. 대표팀 선발전과 각종 국내 대회에선 세계태권도연맹(WTF)이 공인하지 않은 다른 제품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실전에서 장비에 적응하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안이한 대표팀 관리도 비판의 대상이다. 이번 대표팀 선수 가운데 절반 이상은 처음으로 대표팀 1진 태극 마크를 달았다. 또 4월에 최종 선발된 선수들은 7개월 동안 공식 경기에서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국제 경기에 강한 선수를 선발하고 훈련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지적이 몇 년 전부터 나왔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귀를 닫았다.

    하지만 이를 한국의 추락으로만 볼 수 없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태권도가 세계화 단계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대한태권도협회 양진방 사무총장은 “태권도는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종목”이라며 “국제 대회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독식할 땐 우리끼리 해먹는다고 욕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또 “우리 전력은 후퇴하지 않았다. 다만 태권도 저변이 넓어지면서 상대국 전력이 상향평준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태권도 세계화는 짧은 시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현재 WTF에 소속된 회원국 수는 192개. 올림픽 26개 종목 주요 연맹 회원국 가운데 10번째로 많다. 특히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세계화가 급속도로 이뤄졌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세계화를 위해선 개선할 부분이 많다. 우선 종주국 한국이 좀 더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런 요구와 관련해 WTF 조정원 총재는 기존 한국 및 한국인 중심으로 운영된 기구를 대폭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또 실무책임자도 외국인으로 임명하는 등 세계화를 위한 인적 쇄신을 단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유럽,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폐쇄적인 태권도 단체 운영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한체육회 고위 관계자는 태권도가 나아갈 길을 일본이 종주국인 유도의 사례에서 찾았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유도의 세계화를 위해 많은 부분 기득권을 양보했다. 연맹에서 각국 대표를 적극적으로 흡수해 위원회를 구성했고, 세계유도연맹 수장 자리도 고집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덕분에 일본은 메달을 잃었지만 세계화를 얻었다”며 “태권도도 작은 것을 희생하고 브랜드 이미지란 큰 파이를 챙길 시점”이라고 말했다.

    WTF,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등 국내에 연고를 둔 각종 단체의 집안싸움도 태권도 세계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관계자는 “태권도 단체 인사들이 벌이는 밥그릇 싸움을 보면 정치인들보다 더 정치적”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 국내 대회에서 사용되는 전자호구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WTF에서 라저스트와 대도 두 업체의 호구만 공인 인증했음에도 대한태권도협회는 KP·P 호구를 썼다. 결국 이러한 엇박자로 인한 피해는 애꿎은 선수들이 봤다. 두 단체 사이 해묵은 자존심 싸움이 부른 생채기다.

    피할 수도, 피할 이유도 없는 세계화

    ‘재미있는 태권도’를 향한 노력도 필요하다. WTF는 태권도 경기장 규격을 줄여 박진감을 더했고, 차등점수제를 도입해 공격적인 태권도를 유도했다. 하지만 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태권도 관계자들은 더 다양한 기술로 관중의 눈을 사로잡고, 화끈한 공격으로 재미를 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태권도는 이제 한국만의 전략 종목이 아니다. 이란에는 태권도장만 3500여 개가 있다. 리그제로 운영하는 클럽 대항전도 활성화돼 선수들은 매주 경기를 치르며 실전 감각을 익힌다. 중국은 국가 차원의 집중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태권도 강국이 됐다. 대만 역시 태권도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다. 대만의 올림픽 첫 금메달도 2004년 태권도에서 나왔다. 태권도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제작됐고, 태권도 선수가 연예인을 능가하는 대접을 받는다.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실격패한 이후 대만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이유도 이런 국민적인 태권도 사랑과 무관치 않다.

    태권도 세계화와 관련해 WTF 양진석 사무총장은 “60년대부터 꾸준히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사범들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태권도 단체들의 자정 노력이 계속되고, 전자호구 사용으로 심판 공정성이 확보되고 경기 박진감이 늘어난 것도 태권도 인기에 기여한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태권도 관계자는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태권도 단체들이 ‘삼위일체’가 돼 국제 대회를 많이 유치하고, 저소득 국가 선수들을 초청해 태권도 이미지를 홍보한 것도 세계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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