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걸리는 결핵에 내가?’ 30대 직장인 조영진(가명) 씨는 2년 전 결핵 진단을 받고 큰 충격에 빠졌다. 직장에서 야근이 잦아 피곤한 적이 있긴 했지만 건강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살아온 그였다. 어느 날부터 입맛이 없고 고열과 오한이 반복돼 병원을 찾았다가 결핵 진단을 받았다. 조씨는 2년이나 약을 복용한 끝에 치료를 끝낼 수 있었다.
국민 3명 중 1명 결핵균 감염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즈음이면 많은 사람이 연례행사처럼 크리스마스 실(seal)을 구입해 카드 봉투에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실 판매 수익금은 결핵 환자를 위해 쓰였다. 결핵은 결핵균에 감염돼 일어나는 전염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주로 발병한다. 그래서 먹고살기 어려운 후진국 사람들이 잘 걸리는 일명 ‘후진국병’으로 통한다. 결핵은 공기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염되는 사회적인 질병. 한국도 6·25전쟁 이후 영양 상태는 물론 위생 상태, 의료 서비스 등이 낙후해 1970년대까지는 결핵 환자가 넘쳐났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환자가 줄어들기 시작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이런 인식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나라 결핵 발병률과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난 것.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결핵 환자는 3만5845명, 사망자는 2292명다. 2008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발병 환자는 88명, 사망자는 5.5명으로 일본(22명·1.8명), 미국(4명·0.27명)과 비교해 4~18배나 많다.
특히 20대의 발병률이 10만 명당 81.6명으로 60대 이상 노년층을 제외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는데 이는 위생, 영양 상태가 낙후한 후진국의 결핵 발병 양상과 유사하다. 선진국의 경우 결핵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년층에서 주로 발병한다.
물론 1965년만 해도 인구 10만 명당 결핵 환자가 5000여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하게 환자가 감소했다. 국민의 연간 결핵감염 위험률은 1965년 5.3%에서 1975년 2.3%로, 2004년에는 0.25%까지 떨어졌다. 이는 1962년부터 정부가 결핵퇴치 사업의 일환으로 예방 접종, 약 처방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덕분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 발병자와 사망자가 많은 점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또 약 6개월간 약만 잘 복용하면 98% 이상의 완치율을 보이는 결핵이 아닌, 각종 결핵약에 내성을 가진 내성결핵 환자가 늘어나는 점도 특이하다.
내성결핵은 1차 치료제에 내성을 가져 2차 치료제로 치료하는 다제내성결핵과 2차 치료제에도 내성을 가진 광역내성결핵이 있다. 일반적으로 다제내성결핵은 치사율이 26%, 광역내성결핵은 5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2500여 명의 내성결핵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립 서북병원 조영수 결핵과장은 “내성결핵은 환자 1명이 10~15명을 감염시킬 정도로 전파력이 강하다”며 “처음부터 내성결핵에 감염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다른 OECD 가입국과 비교해 유독 결핵에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결핵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핵은 일반적인 감염성 질환과 달리, 감염이 되더라도 즉시 발병하는 질환이 아니다. 감염자의 5~10%만 즉시 발병하고, 수십 년 동안 잠복했다가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발병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결핵이 폭발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감염자가 많다는 설명. 현재 국민의 3분의 1이 결핵 감염자다.
1 결핵 환자의 X선 촬영 사진. 2 결핵균. 건조한 상태에서 오래 살며 산, 알칼리 성분에도 잘 견딘다. 3 결핵 후유증으로 손상된 폐. 줄기세포로 만든 인공 기관지를 이식했다.
하지만 젊은 층에 환자가 집중돼 있고 신규 환자 발생률도 높은 것은 환자 관리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선진국 역시 감염자가 많은 시절이 있었지만 40~50년 전부터 체계적인 결핵 관리 덕분에 현재는 이미 결핵균에 감염된 고령층에 환자가 집중돼 있다.
결핵 퇴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염성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해 감염자 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환자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는 1965년부터 1995년까지 5년마다 전국 실태조사를 했으나 2000년 이후 이를 폐지하고, 보건소와 의료기관에서 의사들이 정부에 환자 현황을 신고하는 결핵정보감시체제를 시행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 에이즈결핵관리과 조은희 연구원은 “민간 병원은 의사들이 환자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통계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핵 환자는 약을 약 6개월간 먹어야 하는 데다 양도 많기 때문에 도중에 안 먹거나 불규칙하게 복용하기 쉽다. 그러다 보면 내성결핵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2차 약은 2년 가까이 먹어야 하며 이마저 실패할 경우 폐절제술을 해야 하고 치사율이 높아져 상황이 심각해진다. 이에 정부는 2009년부터 결핵 환자의 복용률을 높여 완치를 유도하고자 민간공공협력결핵관리사업(이하 PPM사업)을 도입했다. PPM사업은 민간의료기관 및 보건소 등에 결핵관리 전담간호사를 두어 결핵 환자의 내원, 복약 여부 등을 관리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2006년을 기준으로 결핵감시정보체제에 신고한 환자가 연간 250명 이상인 민간 의료기관에만 전담간호사를 파견한 데다 그 수가 50여 명에 그쳐 취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더구나 지난 10월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하균 의원은 “전담간호사 절반이 다른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전담간호사를 326명으로 증원할 예정이라고 밝힌 상태다.
한 알에 6만 원? 약값 정부 지원 절실
결핵균은 공기를 통해 전염되기 때문에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핵 감염자를 격리 치료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009년 결핵과 관련한 입법토론회를 개최한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미국은 결핵 감염이 확인되면 바로 격리시켜 치료할 뿐 아니라 환자가 접촉한 가족, 지인들까지 감염 여부를 검사한다”며 강제적 격리 조치와 예산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국가결핵관리 사업 예산을 늘려 입원 치료를 받는 결핵 환자에게 최대 2주까지 하루 3만 원의 지원비(결핵상병수당)를 주는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다. 하지만 최 의원은 “결핵 환자 중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3만 원을 지급하면 입원 치료를 받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핵은 공기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염되는 병으로 사실상 완벽하게 차단하고 예방하기가 어렵다. 특히 전염성 질환자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신의 병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어 감염 위험성은 더 높아진다. 전문가들은 결핵을 가벼운 질병으로 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은희 연구원 역시 “3월 24일 결핵의 날 정도에야 예상보다 결핵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언급되고 다시 문제의식이 사라진다”고 전했다.
현재 결핵 환자 발생과 사망에 따른 사회적 부담 및 손실액이 연간 82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적정한 예산지원을 통해 결핵 환자를 하루빨리 치료하고 감염 자체를 막는 것이 더 경제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