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본인들. 일본의 다양한 문학상은 작가들이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 2월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2008년 30개 대학 도서관 대출현황을 살펴보면 서울대 도서관의 경우, 대출 상위 도서 10권 중 4권이 일본 소설이었으며 그중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쓰쓰이 야스타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국민대와 단국대는 각각 상위 20위권 이내에 일본 소설이 11권이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 직원들이 직접 수상작 선정
일본 소설이 이처럼 한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뭘까. 많은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것 중 하나가 일본 소설이 가진 ‘스토리의 힘’이다. 게이 남편과 알코올중독자 아내의 결혼생활을 그린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하는 여성의 살인 사실을 은폐하려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천재 수학교사와 그를 뒤쫓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등 국내 문학작품에서 볼 수 없던 감각적이고 독특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앞세워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스토리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의 개성 있는 문학상이 기여한 바 크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문학상이 가장 많은 나라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쿠타가와상(芥川賞)’과 ‘나오키상(直木賞)’을 비롯해 ‘포프라샤 소설 대상’ ‘서점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등 위키피디아 사전에 올라 있는 문학상만 200개가 넘는다.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1년에 2번, 1월과 7월에 수상작을 선정해 발표한다. 아쿠타가와상이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신인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면 나오키상은 대중문학을 하는 중견 작가에게 수여된다는 점이 다르다. 과거에는 아쿠타가와상이나 나오키상을 받으면 10만부 이상의 판매량이 보장된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작가들에겐 두 상이 여전히 최고의 영예이자 흥행 보증수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1976)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350만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이 밖에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는 1997년 ‘해협의 빛’으로,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는 같은 해 ‘가족시네마’로, 와타야 리사는 2003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최연소 수상자(19세)라는 기록을 세우며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대중성 있는 작품에 무게를 두는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는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1997),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1988)가 대표적인데, 두 작품 모두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으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초등학생 이하만 응모하는 ‘12세 문학상’도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들은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1, 2차 투표를 거쳐 선정된 10개 작품을 선정위원들이 모두 읽은 뒤 그 안에서 다시 3개 작품을 뽑는데, 이때 추천 이유를 반드시 적어내야 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서점 직원들이 수상작을 정하다 보니 문학성이 강한 작품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한 작품이 뽑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상을 받은 모든 작품, 즉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2005), 릴리 프랭키의 ‘도쿄 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2006), 사토 다카코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2007),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2008)가 모두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거나 제작 중이다.
또 하나 화제가 되는 문학상은 ‘포프라샤 소설 대상’이다. 2005년 출판사 포프라샤가 신세대 작가를 발굴하고자 제정한 이 상은 상금이 무려 2000만엔(약 2억7000만원)에 이르며 응모작 선정을 외부 작가나 평론가에게 맡기지 않고 이 출판사 직원들이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응모하는 작가가 초등학생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을 둔 ‘12세 문학상’도 있다. 2006년 쇼각간(小學館)에서 제정한 상으로 작문이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이야기 만드는 재미를 느끼게 할 취지로 만든 것이다. 이 밖에 일본 문학상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SF, 미스터리 등의 장르소설에 수여하는 상이다. ‘일본 SF 대상’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 ‘에도가와 란포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에도가와 란포상은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를 기념하고자 1955년에 제정됐다. 신인작가가 대상이며, 수상작은 후지TV를 통해 단막 드라마로 제작되는 기회까지 얻는다.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방과 후’로 이 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한편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은 그해에 발표된 기성 미스터리 소설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리문학상으로 1948년부터 시행됐다.
이름부터 재미있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은 다카라지마 잡지사에서 1988년부터 해마다 발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랭킹이다. 국내, 해외 부문으로 나눠서 각각 베스트 10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 잡지사에서는 2002년부터 신인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도 시행하고 있다. 상금은 1200만 엔(약 1억6200만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으로는 아사쿠라 다쿠야의 ‘4일간의 기적’, 야나기하라 게이의 ‘퍼펙트 플랜’,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일본 러브 스토리 대상’ ‘휴대폰 소설 문학상’ ‘야후 문학상’ ‘어린이를 위한 감동 논픽션 대상’ 등 눈길을 끄는 문학상이 많다.
문학상은 작가에 대한 주목도를 높여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일반인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질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이 때문에 문학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문학상 수만 따지면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성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은 많지 않다.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한탄하기 전에 개성과 색깔이 분명한 문학상을 제정해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면 어떨까. 이러한 방법으로 일본 소설에 뺏긴 독자들을 다시 불러모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