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를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일본에선 흔한 일이다. 사진은 영화로 만들어진 TV 드라마 ‘고쿠센’.
해외 유명 영화제 잇따라 수상, 자신감 회복
사실 일본에선 자국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1954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이 각각 베니스영화제와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며 서구 영화계에선 ‘아시아 영화=일본 영화=예술영화’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됐다.
특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속 일본적인 배경과 그 안에 담긴 철학적인 질문에 서구사회는 찬사를 보냈다. 개항기 우키요에(浮世繪·일본의 풍속회화)가 서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처럼, 전후 일본 영화는 서구사회에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다.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 TV가 보급되면서 일본 영화계는 쇠퇴기에 들어서고, 해외의 높은 평가에도 영화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대형 영화사 ‘니카츠(日活)’가 도산 위기의 타개책으로 에로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 우리나라에 ‘일본 영화=에로 영화, 저질 영화’라는 공식을 남겨준 ‘포르노 로망’의 시작이기도 하다.
니카츠의 포르노 로망은 정해진 분량의 노출과 섹스신만 들어가면 나머지는 모두 감독의 재량에 맡기는 파격적인 정책으로 표현의 자율권을 보장해줬다. 프랑스 68혁명의 여파로 학생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과감한 성적 표현에 비판적 성향을 입힌 니카츠의 포르노 로망에 지식인들은 열광했고, 이는 실력 있는 신인 감독들의 데뷔 무대로 활용됐다.
‘셸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주온’의 구로사와 기요시, 코미디 배우로 더 유명한 다케나카 나오토 등 1990년대 이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감독들이 포르노로망을 통해 데뷔했다. 야쿠자 영화, 형사물도 포르노로망과 함께 B급 오락영화의 한 축을 이뤘다. 이처럼 구로사와 아키라로 대표되는 ‘아트 무비’와 폭력, 섹스로 뒤덮인 B급 영화로 연명해오던 일본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지구 정반대편에서 다시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흥행작이 잇따라 등장한 것. 대표적인 작품이 ‘스타워즈’다. 이 영화를 만든 조지 루카스 감독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숨은 요새 속의 세 악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리들리 스콧의 누아르 영화 ‘블랙 레인’은 일본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영화다.
도쿄의 뒷골목이 주무대라는 점은 물론, 일본 누아르의 간판스타인 마츠다 유사쿠와 다카쿠라 겐이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블랙 레인’은 뒷날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제작에 영감을 줬고, ‘공각기동대’는 ‘제5원소’와 ‘매트릭스’에 영감을 줬으며, 이는 다시 2000년대 이후 일본 SF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미쳤다.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 영화에 열광하는 日 관객들
자칭 ‘일본 문화 오타쿠’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일본 영화 ‘여죄수 사소리’를 리메이크한 ‘킬 빌’을 통해 일본 B급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다. 특히 ‘재패니스 호러’라 불리는 일본 공포영화는 할리우드 영화계에 새로운 공포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작품에 대한 열광일 뿐, 정작 일본 최신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최근 몇 년간의 흥행작 대부분은 TV방송국에서 제작한 영화다. 자사에서 출자한 영화의 흥행을 위해 화려한 캐스팅은 물론, 무차별적인 홍보전략을 펼치니 방송국과 손잡지 않은 영화는 홍보전에서 뒤처지게 마련. 심한 경우 히트한 드라마의 속편을 영화로 제작하기도 한다. 방학에 맞춰 10대 취향의 모바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극우주의 영화가 화제작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본 영화의 평가 기준이던 예술성도, 일상성에 기댄 보편적 정서도, 소재와 표현의 참신함도, 영화에 담긴 감독의 철학도 점차 미약해지는 추세다. 상당수 일본 관객은 지금까지 자국의 영화에서 접해보지 못한 다양한 소재와 힘 있는 스토리를 가진 한국 영화에 열광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말아톤’ ‘선물’ 등은 일본에서 새롭게 리메이크했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 등 한국 영화 선전에 대해 일본 영화계는 견제와 동경을 함께 표시한다. 일본 영화는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 영화계는 ‘왜 더 이상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감독이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를 새로운 대안이자 경쟁자로 삼았다. 어렵게 세계 영화사의 톱니바퀴에 편입된 한국 영화와 이미 수레를 굴리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한 일본 영화, 양자의 미래는 상호협력 속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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