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이 여성성을 통해 자아를 찾는 작품 ‘페르귄트’.
그는 어느 날 남의 결혼식에서 신부를 가로채는 파렴치한 죄를 짓고 마을에서 추방되는데, 얼마 후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모험을 떠난다. 그는 숲 속에서 트롤 공주와 결혼하기도, 예언자로서 추앙을 받기도 한다. 또 이집트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등 판타지적인 여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는 결국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별 의미 없는 과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페르귄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머니’, ‘순결한 여인’의 표상인 솔베이지의 사랑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솔베이지는 그가 모든 여정을 끝마치고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구조, 캐릭터, 주제 면에서 ‘파우스트’와 비교된다. 특히 페르귄트를 끝없이 기다리는 여주인공 솔베이지는 여성성을 통해 자아를 찾고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레첸과 같은 존재라 하겠다.
솔베이지와 어머니는 여성성, 자궁, 순결함 등을 상징하는 우산을 들고 다니고,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지니고 다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듯 잡동사니를 잔뜩 실은 카트를 끌고 다닌다. 페르귄트의 심리 공간을 묘사하는 무대 디자인은 불투명한 반사판을 뒷벽 전면에 설치해 다양하게 왜곡된 상을 만들어냈다. 또한 사다리, 소파, 자전거, 화분 등 최소한의 소품만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음악은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곡들이 사용되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는 솔베이지가 등장하는 몇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직접 양파껍질을 씹어 먹거나 신체를 노출하는 몸 연기와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페르귄트’는 긴 희곡이다. 게다가 주제가 철학적이라 이야기를 템포감 있고 흥미롭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양정웅 연출의 ‘페르귄트’는 대사를 축약시키고 이미지를 강조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듯한 초현실적이고 모던한 비주얼이 돋보인다(문의 02-2005-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