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여성들이 제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 소비자 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평양 주요 거리의 상점들은 ‘제3세대 이동통신’이라고 적힌 포스터를 내걸었다. 이 포스터는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텔레콤과 북한 체신성이 합작한 ‘고려링크’의 홍보물. 북한에 WCDMA 기술을 제공한 오라스콤텔레콤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호텔, 건설, 통신업을 벌여온 오라스콤그룹의 계열사다. 이 회사의 북한 내 이동통신 사업권 유효기간은 25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오라스콤텔레콤의 자회사 CHEO 테크놀로지가 고려링크 지분의 75%를, 북한 측이 25%를 가졌다고 전한다. 2008년부터 3년간 4억 달러를 쏟아부어 2012년엔 가입자 10만명을 확보하는 게 고려링크의 목표. CHEO 테크놀로지는 가입자당 월별 평균 수익을 12∼15달러로 계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WCDMA 환경에선 고속 데이터 송신, 모바일 인터넷도 가능하다. 오라스콤텔레콤이 북한 전역에 구축할 이동통신망은 한국의 이동통신망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남북의 이동통신망을 잇고 ‘남북 사업자 간 협약’을 체결하면, 방북한 서울 사람과 방남한 평양 사람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집트 통신회사와 북한 체신성 합작
고려링크 개통 이전에도 북한은 휴대전화망을 갖추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노동당 간부들이 특수 용도로 먼저 사용했다. 기존의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는 태국의 록슬리그룹(Loxley Group)이 참여한 록스팩(Loxpac)과 북한의 조선체신회사가 각각 70%, 30%의 지분 투자를 통해 세운 동북아전기통신회사(NEAT·T)가 운용했다.
“북한이 휴대전화 서비스를 언제 처음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NEAT·T가 1998년 나진·선봉에 휴대전화 500회선을 개통했고, 한국계 교포가 운영하는 LHL(Lancelot Holdings Ltd.)이 북한과 30년간 IDD(국제자동통화) 및 이동통신을 공급하는 사업계약을 체결했으며, 1999년 홍콩의 POH(Pearl Oriental Holdings Ltd.)가 LHL의 사업권 50%를 약 300만 달러에 매입해 북한의 IDD 및 이동통신 분야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NEAT·T는 평양을 필두로 남포와 각 도 소재지, 개성시, 평양-원산, 원산-함흥 등 주요 고속도로, 황해북도의 16개 시·군 가운데 9개, 양강도의 보천군, 삼지연군, 대홍단군에서 서비스를 제공했다.”(이홍열 TTA·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표준지원팀 차장)
북한의 휴대전화 수는 용천역 폭발사고 직전까지 빠르게 늘었다. 2004년 5월 북한 국방위원회가 휴대전화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지침을 주민에게 하달했을 때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3만명이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정 관계자, 평양 주재 외교관, 국제기구의 현지 주재원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북한 당국은 처음엔 당·정·군 고위 간부에게만 국비로 휴대전화를 지급하다가 나중엔 일반 주민에게도 휴대전화를 팔았다. 가입자 수가 적어 수지를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북한 관료 출신 탈북자 L씨)
TTA에 따르면 북한의 휴대전화 가격은 비쌌다. 2002년 기준으로 북한에서 휴대전화를 쓰려면 가입비 750유로(1유로=북한돈 160원, 한국돈 108만원)와 단말기 값 300∼360유로 등 1050∼1110유로(한국돈 151만∼160만원)가 들었다. 통화요금도 전화를 걸 때 1분에 15원(북한돈)에 달했으며 수신할 때도 일정한 요금을 내는 쌍방향 요금제를 실시했다. 북한의 시내전화 요금은 3분에 35전인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려면 선불카드가 필요했다. 북한돈으로 3000원(800분 통화), 9000원(2400분 통화), 1만5000원(4000분 통화)짜리 세 종류가 있었다. 북한 체신성의 허가를 받은 휴대전화 전문 판매점이 취급한 브랜드는 미국의 모토롤라, 핀란드의 노키아, 중국의 TCL과 BIRD 등 20여 개다. 주민들은 평양시 전신국에서 가입 수속을 밟은 후 단말기 대금을 지불하고 선불카드를 구매해 사용했다.”(이홍열 TTA 차장)
2004년 휴대전화 서비스를 중단했을 때 국비로 지급한 휴대전화를 당국이 압수한 것엔 불만이 적었지만, 고가의 휴대전화를 자비로 구입한 주민들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한 탈북자는 “당국은 주민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당국에 대한 신뢰도가 WCDMA 가입자를 확보하는 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링크의 가입비와 통화요금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2004년 서비스 중단 때 주민 휴대전화 압수
북한의 휴대전화 사용 금지 조처와 용천역 폭발사고를 연결지어 들여다보는 시각이 많다. 이 폭발사고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암살 기도였으며, ‘반(反)김정일’ 세력이 중국 거주 탈북자들과 휴대전화를 사용해 암살을 모의했다는 것. 폭발사고는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김 위원장이 탄 기차가 용천역을 통과한 지 9시간 만에 일어났다.
평양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 K씨는 “용천역 폭발사고 이전에 북한에서 휴대전화망을 유럽식 GSM(전 지구적 이동통신 시스템)에서 미국식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한 것엔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발생한 통제상의 여러 문제를 한 템포 끊어서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금지 조처는 폭발사고가 없었더라도 내려졌을 수 있다”고 전했다.
앞서 언급했듯 북한은 2004년 5월 이후 3만여 대의 단말기를 회수하면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했다. 이 조처 이후에도 특정 계층과 일부 외국인은 휴대전화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국이 엄격하게 단속했지만 북-중 국경 지방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은 근절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인들과 자주 통화하는데, 식량 사정이 1995년 ‘고난의 행군’ 초기보다도 나쁘다. 아사자(餓死者)가 나타났으며 통제도 이완됐다. 수해 탓에 농사도 망쳤다.”
2007년 10월 탈북자 K씨는 여름 대홍수로 식량난이 가중된 북한의 상황을 서울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파악한 뒤 이렇게 말했다. 국내 언론이 북한의 식량난을 보도하기 이전의 일이다. 그는 지금도 북한에 거주하는 지인과 수시로 통화한다. 중국 휴대전화가 북-중 국경에 이웃한 북한지역에서 터지는 덕분이다.
중국 휴대전화를 보유한 북한 주민들은 북한의 기지국이 아닌 중국의 기지국을 통해 중국 혹은 다른 나라 사람과 통화한다. 주민들은 중국의 지인이나 중국 상인을 통해 휴대전화를 구입한다. 중국 이동통신회사가 국경지역에 기지국을 늘려 변경지역의 통화 품질도 우수하다. TTA에 따르면 중국이동통신이 제공하는 GSM 방식은 송신탑을 중심으로 통화 가능 지역이 15km에 그치지만, 중국연합통신의 CDMA 방식은 통화 가능 지역이 30km로 넓은 데다 통화 품질이 우수해 북한 주민들은 GSM 방식보다 CDMA 방식을 선호한다.
2008년 여름까지만 해도 북한 당국은 “휴대전화 사용자들은 자수하라. 잡힌 자는 엄벌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특히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 휴대전화 단속이 거셌다. 북한의 전파 기술자들이 최신형 휴대전화 전파탐지 장치로 단속함으로써 신의주시 주민들의 휴대전화 사용이 어려웠다. 그러나 단속의 손길이 닿지 않는 대부분의 변경지역에선 중국 휴대전화가 유용했다.
북한의 무역 일꾼들은 중국의 사업가와 통화할 때 당국이 엿듣는 관공서의 국제전화 대신 변경지역으로 이동해 휴대전화로 통화한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막고자 전파 교란도 시도했지만, 중국 지역에서까지 휴대전화 불통 현상이 일어나 북한과 중국은 2008년 2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무선주파수 협조회담을 열었다.
“휴대전화 재개통은 자신감의 표현”
최근 개통한 WCDMA는 평양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이 과거에 쓰던 GSM 방식의 휴대전화는 휴대전화끼리의 통화 및 국제전화 용도로만 사용됐다. WCDMA가 유선전화와 연결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 과거에 GSM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북한 고위층이 도청이 쉬운 휴대전화 서비스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 당국의 조사결과 CDMA 방식은 도청의 편이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WCDMA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재개통한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라는 그들 나름의 성과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 이후의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WCDMA 휴대전화를 도청하는 기술도 당연히 확보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KTF와 SK텔레콤은 1998년부터 북한지역의 이통통신망 구축을 준비해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오라스콤텔레콤에 선수를 뺏긴 셈이다. 한국 이동통신사의 북한 진출은 남북관계 경색 여부를 비롯해 걸림돌이 많았다. 북한 처지에서도 유사시를 고려할 때 국가 기간통신망 구축을 남한 측 기업에 맡기기는 어려웠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WCDMA 개통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오라스콤텔레콤이 주인공이 돼 안타깝다. 상업적으로도 북한의 통신시장은 성장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한국 기업도 앞으로 할 일이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