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기원 실장은 3년 전 ‘문학저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 업무로 바쁘지만 휴가 등 개인 시간을 이용해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원확인을 통해 사고로 사망한 망자를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지만 어떤 가정엔 본의 아니게 아픔을 주기도 하는 사람. 국과수 유전자분석과 박기원(47) 실장은 유전자 분석을 통한 신원확인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박 실장은 1989년 국과수에 입소해 19년 동안 근무하며 서래마을 영아살해 유기사건,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개구리소년 신원확인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에서 유전자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유전자 분석을 통한 미아 찾기 관련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년 전 과거를 회상하던 박 실장은 ‘국과수에서의 초기 생활이 힘은 들었지만 오히려 재미는 최고였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유전자 감식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기초적인 실험만 하는 그야말로 ‘초기’ 단계였다. 1990년대 말부터 관련 장비가 도입되면서 우리나라도 유전자 분석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국과수의 유전자 분석 실력은 기술적 측면에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시스템에선 많이 뒤져 있는 것이 아쉬움이죠.”
“유전자은행 아직 없는 것 아쉬워”
그는 인권단체의 반대로 유전자은행이나 유전자 검색이 활발하게 연구되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했다.
“세계 60여 나라에서 하는데 우리나라만 못하고 있죠. 인권단체의 반대도 심하고. 10대 경제대국으로서는 창피한 일이죠. 국가가 개인 정보를 소유하면 악용될 소지가 커진다는 것이 반대 논리인데, 사실 유전자로 개인을 식별하는 숫자는 주민등록번호보다 의미 없는 숫자거든요.”
생물학을 전공해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박 실장을 냉철한 과학자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문청(문학청년)’이기도 하다.
“대학 때부터 습작 형태로 글을 많이 썼어요. 예전부터 시인을 동경했죠.”
박 실장은 3년 전 ‘문학저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업무로 바쁘지만 휴가 등 개인 시간을 이용해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 출판은 안 했지만 나름대로 시집 제목을 붙여놓고 시를 쓰고 있어요.”
출간은 하지 않고 시집만 계속 만들고 있다니 이상하다. 여기에는 시에 대한 박 실장의 작은 욕심이 작용했다.
“문학저널보다 더 큰, 예컨대 신춘문예 같은 곳에서 등단해 인정받은 뒤 출판하고 싶어요. 사실 제가 등단한 곳에선 너무 많은 사람들을 등단시켜주더군요.(웃음) 제 실력이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 제목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위하여’다. 이학박사가 지은 시집 제목 치고는 다소 철학적이다.
“초창기 시는 생명, 존재 등에 관한 좀 무거운 시예요.”
두 번째 시집도 60% 이상 준비됐다고 한다. 제목이 ‘종이 호랑이’로 특이하다. 첫 번째 시집과는 달리 수련적인 시를 많이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세 번째 시집도 들어 있다.
“이번엔 다른 분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범죄와 관련된 것으로요. 사실 범죄와 관련된 문학 장르가 추리소설 말고는 없잖아요? ‘CSI 시를 말하다’, 멋질 것 같지 않나요?”
지금까지의 얘기만 들어보면 이 사람이 한국 유전자 분석의 대가인지, 아니면 세상을 향해 생명의 언어를 뿜어내는 시인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정말 박 실장이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둘 중 하나를 택해보라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둘 다 포기하기 싫어요.(웃음) 뭐, 욕심 같은 거죠. 유전자 분석도 문학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박 실장은 직업 특성상 시신을 많이 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은 시신 보기를 꺼린다. 시신을 바라보는 느낌은 남다를까? 하지만 박 실장은 여전히 시신을 볼 때면 무섭다고 했다.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때는 워낙 시신이 많이 훼손돼서 신경이 별로 쓰이지 않았어요.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죠. 하지만 다른 사건들은 형체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겁나더라고요. 경력이 19년이나 됐는데도 말입니다.(웃음) 겁나는 건 겁나는 거고,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한답니다.”
시신을 보는 것은 무서울지라도 직업에 대한 긍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보통의 부모들이 자식은 자신과 다른 길을 가기 원하지만, 박 실장은 자식들도 같은 길을 가기를 바란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딸 모두 이과를 전공하겠다고 한다며 그는 흐뭇해했다. 딸은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한국의 CSI로 활동하고 싶어한다.
자녀들도 관심, CSI 대물림 예상
박기원 실장이 유전자 분석 경험을 바탕으로 쓴 ‘범죄의 재구성’.
박 실장의 바람이 이뤄진다면 대를 이어 국내 최초로 국과수에서 일하는 부자(父子) 연구원이 탄생할 것이다.
박 실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펴냈다. 3부작을 목표로 현재 2권까지 출간했고, 마지막 권에 대한 집필 작업이 한창이다.
유전자 연구하랴, 시인으로 활동하랴, 논문 쓰랴 바쁜 와중에 어떻게 책까지 쓸 생각을 했을까?
“1권 쓰기가 힘들었죠. 다음부터는 노하우가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3권까지 쓴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아내도 관심을 가지고 독자 처지에서 많은 의견을 줬고요.”
박 실장은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과학수사 책이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범죄에 많이 노출돼 있어요. 다른 부분은 엄청나게 신경 쓰고 대비하지만 범죄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공부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박 실장은 자신이 그런 소임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이렇게 중요한 데 사용되는구나. 이런 것만 알고 있어도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해는 지고 바깥은 어둠에 잠겼다. 돌아서는 기자에게 박 실장은 한 가지를 부탁했다.
“사람들이 과학수사에 관심을 가지고, 방송이나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은 환영합니다. 다만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흥미 위주로 접근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진지함도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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