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체 포스트’의 클라우스 춤빙켈 사장. 검소한 CEO로 알려졌던 그의 리히텐슈타인 비밀계좌와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독일인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알프스 산맥 한복판에 그림같이 자리잡은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국토 면적(남북 25km, 동서 6km)이나 인구(약 3만명)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다. 그렇지만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9만 달러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세계 최초로 우표를 발행한 ‘우편의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리히텐슈타인의 은행은 이웃 나라 스위스 은행과 더불어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각국의 검은 뭉칫돈이 알프스의 미니국가로 흘러 들어온다.
유명 경영인 춤빙켈 약 200억원 몰래 예치 드러나
리히텐슈타인에서는 회사나 재단법인을 만드는 일이 전혀 까다롭지 않다. ‘가족재단’은 리히텐슈타인에만 있는 제도인데, 그만큼 간단히 소규모 법인을 만들 수 있다. 재단법인을 만들 때 관청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재단의 목적 설정이나 기금 운용 등에서도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누구나 며칠 만에 뚝딱 재단을 만들었다가 자유로이 해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리히텐슈타인 정부에 내야 하는 세금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조성된 기금이 1만8000유로 이상일 경우 총액의 0.1%, 700만 유로 이상일 때는 0.05%의 세금을 한 차례만 내면 된다.
해외 자산가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일하는 브로커들도 많다. 이 브로커들은 재산을 안전한 곳에 은닉하기를 원하는 부자들을 위해 리히텐슈타인에 유령회사 내지는 재단을 만들어 교묘한 방법으로 돈세탁을 한다. ‘우편의 나라’답게 이 나라에는 우체통만 갖춘 유령회사나 허수아비 재단이 - 총국민의 2배가 넘는! - 8만여 개나 된다.
그렇다면 왜 해외투자가 탈세 또는 범법행위가 되는 것일까? 독일 소득세법에 따르면 독일 국민은 모든 소득을 주소지 세무관청에 신고해야 하며, 여기에는 국외 소득도 포함된다. 해외에 소재하고 있으나 독일인의 투자가 들어간 회사의 이익, 그곳 은행에 저금한 돈의 이자소득까지도 독일 관청에 신고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절세를 목적으로 하는 해외투자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은 독일과 이중과세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생기는 독일인의 소득을 독일 정부가 파악할 길이 없다. 또 리히텐슈타인은 지리적으로 독일과 가깝고 독일어를 사용하므로 언어 문제도 없다. 그러니 이 나라가 세금에 시달리는 독일 자산가들에게 ‘면세 오아시스’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독일판 X파일이 열렸다. 지난해 겨울, 독일 연방정보원이 전직 은행원 하인리히 키버에게서 리히텐슈타인 최대 은행인 LGT의 고객 명단과 각종 정보가 담긴 DVD를 420만 유로에 구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안에는 1000여 명에 이르는 독일 예금주와 기타 각국 예금주들의 금융 정보가 담겨 있었다. 연방정보원은 이 자료를 검찰과 세무관청에 넘겨 탈세 혐의를 조사하도록 했다. 추산되는 조세 포탈액만도 최소 3억에서 최대 40억 유로에 달했다.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세금추적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조사대상이 클라우스 춤빙켈이었다.
춤빙켈이 거액의 비밀계좌를 은닉했던 리히텐슈타인의 LGT 은행.
리히텐슈타인 금융업계 체면과 위신 곤두박질
춤빙켈은 도이체 포스트 외에도 감사 등으로 관여한 독일 통신, 독일 항공(루프트한자) 등 직장의 성격상 준공무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집배원 최저임금제 도입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비밀금고에 수천만 유로를 은닉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독일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본인은 초라하게 살면서 거액의 재산을 숨겨야 했단 말인가?
2월 말 ‘슈테른’지 표지에는 100유로 고액권을 손에 쥔 채 활짝 웃고 있는 춤빙켈의 모습이 실렸다. ‘윤리 의식이 결여된 엘리트 - 부자들은 우리 사회를 어떤 식으로 좀먹고 있었나?’라는 제목과 함께. 그에 대한 실망과 비난의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쏟아져나왔다. 재무부 장관인 페어 슈타인브뤽은 “우리 사회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자가 바로 이 체제를 갉아먹고 뒤흔든다”고 비판했고, 전 사민당 원내대표였던 클라우스 베네터는 춤빙켈과 같은 무리를 ‘인간말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사건으로 불의의 일격을 맞은 또 다른 피해자는 리히텐슈타인이다. ‘조세 회피처’라는 의혹이 실제 확인됨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의 체면과 위신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리히텐슈타인의 금융업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고객의 정보가 송두리째 새나가는 은행에 거액의 자산을 예치할 만큼 배짱 좋은 부자가 있을까.
춤빙켈의 비밀계좌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오트마르 하슬러 리히텐슈타인 총리는 베를린을 방문해 “문제는 리히텐슈타인의 은행들이 아니라 독일의 복잡한 조세제도에 있다”고 항의했지만, 국제적 기준을 들이대며 리히텐슈타인의 개혁을 요구하는 메르켈 총리 앞에서 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2000년과 2005년에 걸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모로코 안도라 등과 함께 리히텐슈타인을 ‘돈세탁과의 전쟁에 비협조적인 나라’로 경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9·11테러 이후 테러단체들의 자금줄을 죄고 있는 미국 역시 리히텐슈타인의 금융 투명성을 강하게 요구한 바 있다. 국제사회 여론에 밀린 리히텐슈타인의 통치자 알로이스 왕자는 최근 “법과 제도를 국제 기준에 맞게 수정하는 것을 검토”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금융 투명성을 높이는 제도개혁만으로 검은돈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또한 탈법, 불법으로 돈을 빼돌리거나 취득하는 것이 사회 고위층, 부자들만의 반사회적 범죄라고 치부할 이유도 없다. 우리 개개인의 모습을 반성해본다면. ‘평범한 보통 사람은 (세금) 도둑질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지적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