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위 깍지 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만…” 하더니 슬며시 여닫이문을 열고 나간 뒤 어디선가 새 담배 한 갑을 들고 왔다. “원래 담배는 안 피우는데….” 김흥래(67) 전 행정자치부 차관은 담배를 한 개비 물고 성냥을 켜고는 깊숙이 연기 한 모금을 삼켰다.
“2000년 1월 김기재 전 행정자치부 장관에서 최인기(현 통합민주당 정책위의장) 장관으로 바뀌니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에서 ‘선거를 주관하는 부서에 호남 출신 장·차관으로 어떻게 공정한 선거를 치르겠느냐’고 비판했어요. 안타까웠습니다.” ‘차관 재직기간(1999년 5월~2000년 1월)이 8개월여밖에 안 되는데…’라는 말에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시 최 장관과 청와대에서 개각 전에 언질을 줬어요. 제게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직을 추천했는데 안 가겠다고 했어요. 후배들 보기도 미안하고 이사장 3년 임기를 채우는 것보다 나의 ‘상품가치’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 입학했죠. 이 얘기는 처음 꺼냅니다.”
36년 공직은 옛일 … 직접 손님 맞고 서빙하며 활기찬 나날
차관 인사 발표가 있던 날 저녁, 그는 난생처음 신라호텔 중식당으로 부인 하효순 씨를 불렀다. 출근하면서 이미 “오늘 휴대전화 켜놓으시게”라고 한마디 한 터였다. 이를 어떻게 알고 왔던지 당시 최 장관 비서관이던 최종만 현 광주 부시장이 찾아왔다. 셋은 그렇게 자장면을 먹으며 말없이 ‘김 차관 36년 공직생활’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자장면으로는 회한(悔恨)이 덜 풀렸던 탓일까. 8년 전 언론 지상에서 사라진 김 전 차관을 3월10일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퓨전중식당 ‘칸지고고’.
지난해 7월 단국대 행정법무대학원장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 발품을 판 결과물이다. 231㎡ 면적에 12명의 직원이 일한다. 그는 이날 여느 ‘중국집 사장님’처럼 출입문을 열어주며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점심 저녁시간에는 직접 손님을 맞고 서빙을 한다. 화훼시장에 들러 장식할 꽃을 사는 것도 그의 몫. 식자재는 본사에서 공급해준다. “사장님이 계속 출근하면 직원이 불편해하지 않느냐”고 하자 “식당은 맛과 친절, 청결이 기본입니다. 사장이 있으면 아무래도 직원들의 품행도 좋아지고 손님도 기분이 좋죠”라고 했다. 중국집 사장님 다 됐다.
직원들에겐 급여와 4대보험 외에 오피스텔도 하나 얻어줬다. 직원이 즐거우면 맛과 친절은 따라온다는 생각에서다. 평소 잘 알던 이 업체 대표가 처음 ‘중국집’을 권했을 땐 조금 망설였다고 했다.
“전 괜찮았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날 딸 넷, 아들 둘 모두 불러놓고 ‘중국집 사장으로의 변신’을 알렸다. “왜 하필…”이라는 반응을 보이던 자녀들도 엄마 아빠가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열심히 일할 일터를 만들 거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빠의 좌우명 ‘바쁜 꿀벌처럼 살자’를 자녀들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남자의 행복 조건은 다섯 가지예요. ① 건강하고 ② 좋은 부인이 있어야죠. 그리고 적당히 ③ 품위 유지할 돈과 ④ 일거리 ⑤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칸지고고 광진점은 그에게 품위유지비와 일거리를 준다고 했다. 건강은 스스로 챙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사과 1개를 먹으면서 신문 보고 양재천을 1시간 동안 걸은 뒤 사우나를 한다. 주말엔 테니스를 즐긴다. 가끔 좋은 친구나 선후배도 찾으니 그가 말한 네 가지 조건은 채워지는 셈이다.
“욕심은 스트레스를 만들죠. 마음 편하게 먹으면 건강은 절로 와요. 여기선 ‘차관’ 생각은 전혀 안 해요. 직분에 맞게 행동하죠. 공직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이야기는 다시 공직 시절로 돌아왔다.
공직자들에게 의지·열정·전문성 갖추도록 충고도 잊지 않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김 전 차관은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자랐다. 진도중학교 재학 시절 월사금(다달이 내던 수업료)도 대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사정을 알던 중3 담임선생님이 국립 목포해양고에 장학생으로 갈 것을 권했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건국대 축산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했지만 생활비가 없어 서울 유학은 포기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합격 축하인사를 받던 아버지에게 어렵게 “아버지, 저 안 갑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곧장 뒷산 산지기집으로 들어갔다.
공직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산지기집에서 공부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후 단국대 법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목포시장, 내무부 감사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내무부 국장 자리도 거쳤다.
광주시 기획관리실장 시절엔 5·18 민주화 보상법과 직할시로 승격된 광주의 틀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열공’도 했다.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땄고 퇴임 후에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도 지냈다.
“약을 먹고도 병을 낫게 하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장 기능이 약해 약의 효험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죠. 아무리 좋은 안(案)이 있어도 공직자가 의지와 열정, 전문성이 부족하면 ‘백안(百案)이 무효’예요.”
‘공직자 보약론(補藥論)’을 꺼내던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주전자에 담긴 자스민 차를 연방 따랐다. “특히 지방분권은 ‘설사 시스템’이에요. 몸 생각 않고 많이 먹으면 설사하듯 좋은 정책을 줘도 집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부 군 단위 공무원 수준은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이 능력을 키울 기회를 줄인다고 진단했다. 도지사나 시장, 군수 아래서 일하다 ‘한자리’하면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 매년 자격시험을 봐서 전문성을 키우고 중앙과의 인사교류를 확대해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위에서 정책을 입안하면 이를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훈수도 잊지 않았다. “교수 출신 장관이 많대요. ‘교수장관’은 박식하지만 정책 실행 사이에서 가끔 혼동해요. 입각하면 자신의 전문성에 함몰되지 말고 현실감각을 먼저 익혀야 해요.”
그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중앙인사위원회를 꼽았다. 위원회 조직을 살리려니 규제만 만들어 공무원들의 ‘옥상옥(屋上屋)’이 됐다는 것. 정치 입문 여부를 타진하자 그의 머리와 손이 동시에 좌우를 오갔다. “김홍일(통합민주당) 의원의 권유로 2002년 목포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는데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현실 정치는 다르더라고요. 이젠 중국집 사장으로 살렵니다.”
노트북을 닫으면서 ‘남자의 행복 조건’ 다섯 가지 중 ②번이 궁금했다. “아이 여섯 잘 키우고… 많이도 낳았죠? 하하. 가계가 어려울 때 피자집을 차려 도왔어요. 이 정도면 됐죠.” 부인 하씨는 경기 성남시에서 피자가게를 12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가 만들고 여자는 덕 보려면 남자를 키워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2000년 1월 김기재 전 행정자치부 장관에서 최인기(현 통합민주당 정책위의장) 장관으로 바뀌니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에서 ‘선거를 주관하는 부서에 호남 출신 장·차관으로 어떻게 공정한 선거를 치르겠느냐’고 비판했어요. 안타까웠습니다.” ‘차관 재직기간(1999년 5월~2000년 1월)이 8개월여밖에 안 되는데…’라는 말에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시 최 장관과 청와대에서 개각 전에 언질을 줬어요. 제게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직을 추천했는데 안 가겠다고 했어요. 후배들 보기도 미안하고 이사장 3년 임기를 채우는 것보다 나의 ‘상품가치’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 입학했죠. 이 얘기는 처음 꺼냅니다.”
36년 공직은 옛일 … 직접 손님 맞고 서빙하며 활기찬 나날
차관 인사 발표가 있던 날 저녁, 그는 난생처음 신라호텔 중식당으로 부인 하효순 씨를 불렀다. 출근하면서 이미 “오늘 휴대전화 켜놓으시게”라고 한마디 한 터였다. 이를 어떻게 알고 왔던지 당시 최 장관 비서관이던 최종만 현 광주 부시장이 찾아왔다. 셋은 그렇게 자장면을 먹으며 말없이 ‘김 차관 36년 공직생활’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자장면으로는 회한(悔恨)이 덜 풀렸던 탓일까. 8년 전 언론 지상에서 사라진 김 전 차관을 3월10일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퓨전중식당 ‘칸지고고’.
지난해 7월 단국대 행정법무대학원장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 발품을 판 결과물이다. 231㎡ 면적에 12명의 직원이 일한다. 그는 이날 여느 ‘중국집 사장님’처럼 출입문을 열어주며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점심 저녁시간에는 직접 손님을 맞고 서빙을 한다. 화훼시장에 들러 장식할 꽃을 사는 것도 그의 몫. 식자재는 본사에서 공급해준다. “사장님이 계속 출근하면 직원이 불편해하지 않느냐”고 하자 “식당은 맛과 친절, 청결이 기본입니다. 사장이 있으면 아무래도 직원들의 품행도 좋아지고 손님도 기분이 좋죠”라고 했다. 중국집 사장님 다 됐다.
직원들에겐 급여와 4대보험 외에 오피스텔도 하나 얻어줬다. 직원이 즐거우면 맛과 친절은 따라온다는 생각에서다. 평소 잘 알던 이 업체 대표가 처음 ‘중국집’을 권했을 땐 조금 망설였다고 했다.
“전 괜찮았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날 딸 넷, 아들 둘 모두 불러놓고 ‘중국집 사장으로의 변신’을 알렸다. “왜 하필…”이라는 반응을 보이던 자녀들도 엄마 아빠가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열심히 일할 일터를 만들 거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빠의 좌우명 ‘바쁜 꿀벌처럼 살자’를 자녀들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남자의 행복 조건은 다섯 가지예요. ① 건강하고 ② 좋은 부인이 있어야죠. 그리고 적당히 ③ 품위 유지할 돈과 ④ 일거리 ⑤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칸지고고 광진점은 그에게 품위유지비와 일거리를 준다고 했다. 건강은 스스로 챙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사과 1개를 먹으면서 신문 보고 양재천을 1시간 동안 걸은 뒤 사우나를 한다. 주말엔 테니스를 즐긴다. 가끔 좋은 친구나 선후배도 찾으니 그가 말한 네 가지 조건은 채워지는 셈이다.
“욕심은 스트레스를 만들죠. 마음 편하게 먹으면 건강은 절로 와요. 여기선 ‘차관’ 생각은 전혀 안 해요. 직분에 맞게 행동하죠. 공직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이야기는 다시 공직 시절로 돌아왔다.
새 일터 앞에 선 김 전 차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김 전 차관은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자랐다. 진도중학교 재학 시절 월사금(다달이 내던 수업료)도 대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사정을 알던 중3 담임선생님이 국립 목포해양고에 장학생으로 갈 것을 권했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건국대 축산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했지만 생활비가 없어 서울 유학은 포기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합격 축하인사를 받던 아버지에게 어렵게 “아버지, 저 안 갑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곧장 뒷산 산지기집으로 들어갔다.
공직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산지기집에서 공부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후 단국대 법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목포시장, 내무부 감사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내무부 국장 자리도 거쳤다.
광주시 기획관리실장 시절엔 5·18 민주화 보상법과 직할시로 승격된 광주의 틀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열공’도 했다.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땄고 퇴임 후에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도 지냈다.
“약을 먹고도 병을 낫게 하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장 기능이 약해 약의 효험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죠. 아무리 좋은 안(案)이 있어도 공직자가 의지와 열정, 전문성이 부족하면 ‘백안(百案)이 무효’예요.”
‘공직자 보약론(補藥論)’을 꺼내던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주전자에 담긴 자스민 차를 연방 따랐다. “특히 지방분권은 ‘설사 시스템’이에요. 몸 생각 않고 많이 먹으면 설사하듯 좋은 정책을 줘도 집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부 군 단위 공무원 수준은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이 능력을 키울 기회를 줄인다고 진단했다. 도지사나 시장, 군수 아래서 일하다 ‘한자리’하면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 매년 자격시험을 봐서 전문성을 키우고 중앙과의 인사교류를 확대해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위에서 정책을 입안하면 이를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훈수도 잊지 않았다. “교수 출신 장관이 많대요. ‘교수장관’은 박식하지만 정책 실행 사이에서 가끔 혼동해요. 입각하면 자신의 전문성에 함몰되지 말고 현실감각을 먼저 익혀야 해요.”
그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중앙인사위원회를 꼽았다. 위원회 조직을 살리려니 규제만 만들어 공무원들의 ‘옥상옥(屋上屋)’이 됐다는 것. 정치 입문 여부를 타진하자 그의 머리와 손이 동시에 좌우를 오갔다. “김홍일(통합민주당) 의원의 권유로 2002년 목포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는데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현실 정치는 다르더라고요. 이젠 중국집 사장으로 살렵니다.”
노트북을 닫으면서 ‘남자의 행복 조건’ 다섯 가지 중 ②번이 궁금했다. “아이 여섯 잘 키우고… 많이도 낳았죠? 하하. 가계가 어려울 때 피자집을 차려 도왔어요. 이 정도면 됐죠.” 부인 하씨는 경기 성남시에서 피자가게를 12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가 만들고 여자는 덕 보려면 남자를 키워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