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①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서양의 눈으로 본 동양)과 ②마이너리티(여성,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다. ①은 스파르타 전사들은 모두 근육이 알알이 박힌 ‘몸짱’이자 ‘얼짱’인 반면, 그들의 타자(동양)인 페르시아 대군은 ‘야만적 괴물’이자 ‘비정상인’으로, ②는 페르시아 대군의 종군위안부 격인 여성들이 실낱 한 올만 걸친 채 남성의 성적 소유물로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 데서 불거진다.
동양을 교화 대상으로 본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단테(왼쪽).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고대 전투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 ‘300’.
물론 영화 제작자 측은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창작자의 손을 떠난 작품은 곧잘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되기도 하고, ‘창작자-작품-사회맥락’을 함께 보려는 비평자들의 노력으로 감상자들은 제작자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독단적 믿음을 기초로 한다. 첫째, 합리적이고 우월한 서양과 일탈적이고 열등한 동양 사이에는 절대적이고 체계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둘째, 동양은 정체돼 있고 획일적이며 자신을 스스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의 관점에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해 동양을 묘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믿음이다. 셋째, ‘황색공포’(Yellow Peril·황색인종이 서양문명을 압도할 수도 있다는 백인종의 공포심을 일컬음)라는 용어가 시사하듯, 동양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서양의 무력으로 통제, 진압돼야 할 대상이라는 믿음이다.
-이화여대 2002년 정시, 학업적성
프랑스 7월혁명`을 소재로 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사진 위). 오리엔탈리즘의 이중성을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스파르타는 여성을 애 낳는 생물학적 도구로만 보는 ‘여성차별 국가’였다. 전사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는 장애아는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하는 ‘장애인 홀로코스트 도시국가’였다. 설령 성장 과정에서 장애인이 되더라도 국가와 공동체 차원에서 배려받을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전혀 없었다. ‘300’에서 선천성 장애인으로 등장하는 에피알테스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왕따’시키는 스파르타를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이 된다.
스파르타에서 선천성 장애아는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300’에 에피알테스가 등장하는 이유는 ‘기회주의적인 장애인’ 이미지는 동양적인 것이라는 ⓑ전략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리고 원래 스파르타의 병영체계는 상급자와의 동성애를 기반으로 ‘정서적 안전망’을 구축했는데, 오늘날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스파르타 병영 동성애 코드’가 영화에서는 배제됐는지도 모른다.
반면 페르시아군의 특수부대는 한센병(문둥병) 환자 같은 장애인의 도가니다. 게다가 비장의 히든카드 장수는 거인 괴물이다. 이는 서양을 대표하는 그리스가 정상적인 문명권이라면, 동양을 표상하는 페르시아는 비정상적인 야만사회라는 인식의 발로일 수 있다. 또한 동양 여성들을 페티시즘(Fetishism·성적 판타지 도구)으로 형상화한 것도 서양우월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동양 여성을 성적 낭만주의로 바라보는 관점은 아주 오래된 서구의 눈요기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노래한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에 감동받아 그림을 그린다.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육감적 몸매의 여인들 사체(死體)가 나뒹구는 화폭에서, 동양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는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자신도 불타 죽는다. 동양의 잔인함과 성적 신경증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그림들이 특히 19세기 프랑스에서 동양적 아름다움에 대한 귀족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해 환상적인 이국주의라는 코드로 유행했다. 예를 들어 제롬의 ‘무어인의 목욕탕’ ‘노예시장’, 앵그르의 ‘터키 욕실’ ‘오달리스크(터키 궁녀)’에서 눈요깃감으로 성적 학대를 받는 여성은 동양인이다. 르뇨의 ‘판결 없는 처형’(1870년)에서 동양인은 잔인하다. 판결도 없이 죄인의 목을 마구 벤 탓이다.
이렇게 18세기 중엽 이래 민속학, 비교해부학, 문헌학, 예술 등 제반 영역에서 체계화된 동양 관련 지식은 기본적으로 양자(서양-동양)의 본질적 관계가 어디까지나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서양인들은 ⓑ전략을 사용해 ‘독재, 잔인함, 게으름, 욕정, 무기력함, 미신적 운명론, 비위생적, 비정상, 문화적 타락’ 등의 이미지로 ‘상상의 변방공동체’ 동양을 창작한 것이다.
예컨대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저열하며, 유치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유럽인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하고 ‘정상적’이다. 동양에 대한 지식은 힘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한 것으로서 동양과 동양인 그리고 동양 세계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1978년), 서울대 2005년 정시
그런데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책 제목 하나가 ‘하나의 언설(Discourse) 패러다임’으로 쓰이는 아주 드문 예다. 원래 오리엔탈리즘이란 소박하게 동양학·동양취향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이드의 책이 나온 이후 ‘(서양의) 동양 편견주의’라는 부정적 의미로 ‘180도’ 바뀐다. 한마디로 서구에서 말하는 동양 또는 동양적인 것이란, 실제의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 서구인들의 편견과 왜곡이 창작해낸 헛된 이미지, 즉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원래 오리엔트(Orient)는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에서 기원했으며,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이란 뜻이다. 고대 서양인들은 오리엔트를 지중해를 경계로 한 그 동쪽을 가리키는 지리적 용어로 사용했다. 중세에도 볼로냐, 옥스퍼드, 아비뇽 등 유럽 주요 대학에 개설된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강좌였을 뿐이다. 19세기엔 동양에 대한 어떤 장르의 환상문학이나 이국적 회화를 가리킨 ‘낭만적 오리엔탈리즘’ 경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란 용어와 개념을 성립시킨 주체가 동양이 아니라 서양이란 점이다. 또한 오리엔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화’ ‘적응시키다’라는 뜻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오리엔트에서 파생된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은 신입생 교육을 뜻하는데,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의 정체가 감지된다. 세계의 중심(주체)을 서양으로 세우고 동양 또는 아프리카, 즉 주변부(변방)를 계몽 및 교화해야 할 대상(문명의 새내기)으로 간주하는 게 오리엔탈리즘의 기본적 성격일 수 있는 것이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스트로 지목한 ‘서양문학의 거장’ 단테,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뿐 아니라 좌파의 상징인 카를 마르크스 역시 “그들(동양인)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다. 다른 누군가가 표현해줘야 한다”며 서양 남성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 추천도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정진농,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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