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에게서 세계화의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주 유명한 의사인 당신은 왜 이런 험한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건가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일에만 쓴다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가슴을 뛰게 한다! 순간 한비야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머릿속이 찌릿해졌다. 아, 가슴을 뛰게 하는 일! 이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직업을 바꾼다.
그녀의 일화를 통해 세계의 문제를 짚어볼 수 있다. 20세기 아우슈비츠가 보여주듯 이성은 붕괴됐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방사능 오염이나 오존층 파괴 등의 예를 들면서 근대를 ‘위험 사회’라고 했다. 근대가 내장한 ‘자민족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의 위험은 초국가적이다.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내뿜는 미국 탓에 지구온난화가 심해지면 미국의 첫 번째 동맹국 일본이 물에 잠길 수 있고, 중국의 사막화 현상으로 인한 황사 피해는 동북아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다.
국제법 틀 얽매인 유엔 비해 NGO 활동폭 넓어
대안은? ‘세계화의 윤리’다. 여기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구명선의 윤리(Lifeboat Ethics). 폭풍우를 만난 ‘지구 구명선’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다. 표류하는 사람들을 모두 태우면 침몰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개체도 지구 전체를 위해선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근본적 생태주의의 시각이다.
둘째는 우주선 윤리(Spaceship Ethics). 무한한 우주 공간을 떠도는 하나의 지구우주선 안에는 자원과 물자가 유한하다. 따라서 지구우주선의 에너지 대신 태양열 등 외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1992년 리우선언의 핵심 개념인 ‘지속가능한 개발’이 좋은 예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를 보자. 그가 보기에 지금의 지구우주선은 자못 비윤리적이다. 근대의 인간중심 논리, 민족국가의 파워 논리가 지배적인 탓이다. 유엔을 무시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 미국의 교토의정서 탈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하노이의 탑’이라는 수학게임으로 세계화의 윤리를 설명한다. 하노이 탑은 중세의 야훼 중심 피라미드나 근대의 인간 중심 피라미드와 다르게, 탑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열려 있다. 미래 모델이다. 반면 위는 막혔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고, 지구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인간이 초국가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구명선 윤리’와 다르다. 또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를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쇼펜하우어, 붓다, 슈바이처, 풍류도의 생각과 통한다. 동물권을 옹호하는 것은 철학자 톰 레이건의 ‘동물권리 옹호론’, 무생물도 껴안는 윤리의 넓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한마디로 인간-동물-식물-무생물 모두를 껴안는 ‘지구공동체 윤리’인 셈인데, 그럼 과연 누가 ‘세계화 윤리의 실현자’인가. 지구우주선의 공동 이익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는 국제기구의 몫이다. 그래서 인종말살, 집단 성상품화, 인신매매, 고문, 동물학대 등의 범죄가 어떤 한 국가에서 일어났을 때 국제기구의 인도적 개입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피터 싱어의 세계화 윤리가 과연 만능일까. 정부기구(Governmental Organization), 즉 유엔만 하노이의 탑을 쌓을 수 있다는 데는 이견이 있다. ‘월드비전’ 같은 비정부기구(NGO)가 오히려 더 하노이의 탑 앞에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 않을까. 유엔은 국제법이라는 틀에 얽매이지만 NGO는 인권과 동물권, 그리고 지구우주선의 모든 존재에 더 얽매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정부의 유엔 분담금보다 살신성인하는 ‘푼돈’들의 가슴이 더 뛸 수 있다는 비판적 안목이 곧 논술의 창의력이다.
관련 기출문제 = 동국대 2004년 수시2 ‘우주선 윤리’, 동국대 2005년 수시2 ‘하노이 탑’, 성균관대 2007년 정시 ‘빈곤의 세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