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도 경쟁력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났지만 너무 뚱뚱하고 못생겨서 무대에 설 수 없는 한나(김아중 분)는 립싱크 가수 아미(지서윤 분)의 목소리를 대신 녹음해주는 ‘얼굴 없는 가수’다. 음반제작자인 상준(주진모 분)은 한나의 목소리를 이용하기 위해 한나를 고용하고, 수려한 외모의 상준을 연모하는 한나는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어느 날 한나는 상준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된다. 상준에게서 선물 받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한나. 그러나 그 드레스는 상준이 선물한 것이 아니라, 뚱뚱한 한나를 조롱하기 위해 아미가 꾸민 장난이었다. 한나와 똑같은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아미의 날씬하고 화려한 모습에 한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 ‘드레스 사건’을 계기로 한나는 전신 성형을 결심하고 95kg의 한나에서 48kg의 제니로 환골탈태한다. 이후 영화는 뛰어난 가창력에 외모까지 받쳐주는 가수 제니의 성공담으로 꾸며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론은 ‘성형수술로 성공한다’쯤이 된다.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비단 영화 속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여자 가수들이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을 목격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전 같으면 불거지는 성형 의혹에 ‘젖살이 빠졌어요’ 식의 변명을 늘어놓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즘은 이런 빤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들도 알기에 당당히 성형 사실을 밝히고, 대중도 그 솔직함에 호응하는 분위기다. 이런 경향은 외모도 경쟁력임을 인정하는 대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가요계에서 몸에 대한 관심은 여자 가수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요즘은 남자 가수들도 우람한 복근을 내세우며 ‘컴백’한다. 그 다부진 복근이 가창력 향상을 위한 복식호흡의 결과라면 할 말 없지만 복식호흡으로 배에 ‘王’자를 만든 가수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몸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기는 했으니 이 너절한 마케팅 전략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룹 버글스(Buggles)가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고 노래한 지 이미 30년 가까이 되니 영화의 이런 설정은 그리 낯설지도 않다. 현실의 가수들 모습이나 영화의 결말을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실에서 취업을 위해 성형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외모는 경쟁력의 한 요소니까.
lookism
흔히 외모지상주의로 번역되는 루키즘(lookism)은 ‘외모에 근거한 차별이나 편견’을 일컫는다. 개인의 성공이나 능력, 심지어 인성마저도 외모를 근거로 판단하는 가치체계인 루키즘은 현대인에게 극심한 차별의 요소로 부상했다. 영화 속에서 한나는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췄지만 외모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로 남아야 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도 뚱뚱한 외모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비만인들은 자기관리에 실패한 게으름뱅이쯤으로 치부돼 갖가지 차별을 받기 일쑤다.
비만인들이 부담스러운 몸 때문에 차별받는다면 ‘완벽한 몸매’를 가진 사람들은 ‘환상의 S라인’ ‘조각 같은 몸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외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최근 유행하는 ‘얼짱’‘몸짱’‘쌩얼’‘S라인’ 등의 신조어는 모두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으로 이어진다. 사실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남성, 여성, 청소년, 성인을 가리지 않는 성형수술과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다이어트는 사회적 병리현상 중 하나로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따라서 대학별 논술고사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주제다. 2007학년도 한양대학교 수시2학기 논술고사의 핵심 개념도 외모지상주의였다. 그러나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찬반 견해를 물은 것이 아니라, 팝의 황제에서 ‘성형의 황제로 거듭난’ 마이클 잭슨과 패션 트렌드를 추종하는 여학생의 사례에 내재한 외모지상주의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 양식과 그 한계를 논하라는 논제가 출제됐다.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는 예쁘게 보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죽음에 이르는 다이어트를 감행하고 살을 찢고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낸다. 이런 세태에 대한 비판은 ‘한 꺼풀의 살갗에 불과한 외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외모지상주의 비판에서 주로 문제삼는 것은 ‘예쁘게’인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해 ‘보이고 싶다’는 열망에 초점을 맞춰보자.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거울(혹은 그와 유사한 매체)에 비친 상(像)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즉, 나의 외모를 보는 시선은 대부분 ‘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며, ‘나’는 ‘보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객체로서 존재한다. 이때 ‘나’는 어디까지나 객체일 뿐이므로 ‘나’의 외모를 평가하는 데 ‘나’의 주관은 배제된다. 오뚝한 콧날에 왕방울 같은 눈, 초승달 같은 눈썹과 도톰한 입술, S라인의 몸매 등 ‘미적 기준’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여 수익을 얻기 위한 상업주의와 이에 영합한 대중매체의 주장에 대한 무비판적 동의 내지 순응일 뿐 ‘나’만의 미적 기준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예쁜 외모에서 오는 만족감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예쁘게 보아주는 그 시선에서 오는 만족감일 뿐이다. 즉, 타인의 시선이 ‘나’로 하여금 성형과 다이어트를 권하고 강요하는 셈이다.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서 ‘나’는 없고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몸뚱이만 존재할 뿐이며, 이는 지독한 인간소외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간소외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것은 이들이 (예쁜) 몸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숭배는 몸에 대한 학대(성형수술과 다이어트)로 나타난다. 몸을 숭배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몸을 학대하다니 역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들이 숭배하는 것은 예쁜 타인의 몸이며 그처럼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예쁜 몸을 숭배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행위에는 동질화의 욕구가 숨어 있다. 자신도 모델, 탤런트처럼 완벽한 몸매와 예쁜 얼굴을 갖고 싶다는, 그럼으로써 주목받고 싶다는 욕구 말이다.
성형과 다이어트에 내재한 욕구가 이런 동질화뿐이라면 살을 찢고 뼈를 깎으며 무리한 다이어트로 죽음으로 치닫든 말든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체적 자유에 해당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동질화 욕구 뒤에 도사린 차별화 욕구를 간파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영화에서 한나가 전신 성형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 ‘드레스 사건’은 한나와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려는 아미의 차별화 욕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영화 속의 아미처럼 비열한 자기과시를 위한 차별화를 시도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통해 타인과의 차별화를 거쳐 좀더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비열한 자기과시를 배제한다면 성형과 다이어트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유용하다고 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차별화의 욕구는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으로 이어지고, 성형과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으로 나타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능이며, 선망의 대상에 대한 동질화 욕구는 정체성 형성의 한 방법이다. 동질화 욕구의 이면인 차별화의 욕구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외모는 경쟁력이며 ‘가장 예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지 않던가.
그러나 특정한 미적 기준을 절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다원화된 가치가 공존하는 현대사회와는 부합하지 않으며, 주체적 판단이 결여된 동질화의 추구는 자아 정체성의 부재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타인의 삶을 억압하여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부당한 차별화는 용납될 수 없다.
미에 대한 추구, 외모지상주의에 내재한 동질화와 차별화 욕구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필요한 미덕은 절제와 균형이다. 영화 속 한나의 식탐은 무절제의 전형이며, 한나에서 제니로의 환골탈태는 극과 극을 오가는 불균형의 전형이다. 인간을 품위 있게 하는 여러 요소들-예컨대 겸손, 지식, 친절함, 관용 등-사이의 균형과 자신의 주관과 타인의 시선 사이의 균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균형으로부터 절제의 미덕도 함께 발휘된다면, 적어도 성형 중독이나 다이어트에 의한 죽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났지만 너무 뚱뚱하고 못생겨서 무대에 설 수 없는 한나(김아중 분)는 립싱크 가수 아미(지서윤 분)의 목소리를 대신 녹음해주는 ‘얼굴 없는 가수’다. 음반제작자인 상준(주진모 분)은 한나의 목소리를 이용하기 위해 한나를 고용하고, 수려한 외모의 상준을 연모하는 한나는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어느 날 한나는 상준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된다. 상준에게서 선물 받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한나. 그러나 그 드레스는 상준이 선물한 것이 아니라, 뚱뚱한 한나를 조롱하기 위해 아미가 꾸민 장난이었다. 한나와 똑같은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아미의 날씬하고 화려한 모습에 한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 ‘드레스 사건’을 계기로 한나는 전신 성형을 결심하고 95kg의 한나에서 48kg의 제니로 환골탈태한다. 이후 영화는 뛰어난 가창력에 외모까지 받쳐주는 가수 제니의 성공담으로 꾸며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론은 ‘성형수술로 성공한다’쯤이 된다.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비단 영화 속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여자 가수들이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을 목격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전 같으면 불거지는 성형 의혹에 ‘젖살이 빠졌어요’ 식의 변명을 늘어놓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즘은 이런 빤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들도 알기에 당당히 성형 사실을 밝히고, 대중도 그 솔직함에 호응하는 분위기다. 이런 경향은 외모도 경쟁력임을 인정하는 대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가요계에서 몸에 대한 관심은 여자 가수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요즘은 남자 가수들도 우람한 복근을 내세우며 ‘컴백’한다. 그 다부진 복근이 가창력 향상을 위한 복식호흡의 결과라면 할 말 없지만 복식호흡으로 배에 ‘王’자를 만든 가수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몸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기는 했으니 이 너절한 마케팅 전략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룹 버글스(Buggles)가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고 노래한 지 이미 30년 가까이 되니 영화의 이런 설정은 그리 낯설지도 않다. 현실의 가수들 모습이나 영화의 결말을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실에서 취업을 위해 성형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외모는 경쟁력의 한 요소니까.
lookism
흔히 외모지상주의로 번역되는 루키즘(lookism)은 ‘외모에 근거한 차별이나 편견’을 일컫는다. 개인의 성공이나 능력, 심지어 인성마저도 외모를 근거로 판단하는 가치체계인 루키즘은 현대인에게 극심한 차별의 요소로 부상했다. 영화 속에서 한나는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췄지만 외모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로 남아야 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도 뚱뚱한 외모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비만인들은 자기관리에 실패한 게으름뱅이쯤으로 치부돼 갖가지 차별을 받기 일쑤다.
비만인들이 부담스러운 몸 때문에 차별받는다면 ‘완벽한 몸매’를 가진 사람들은 ‘환상의 S라인’ ‘조각 같은 몸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외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최근 유행하는 ‘얼짱’‘몸짱’‘쌩얼’‘S라인’ 등의 신조어는 모두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으로 이어진다. 사실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남성, 여성, 청소년, 성인을 가리지 않는 성형수술과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다이어트는 사회적 병리현상 중 하나로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따라서 대학별 논술고사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주제다. 2007학년도 한양대학교 수시2학기 논술고사의 핵심 개념도 외모지상주의였다. 그러나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찬반 견해를 물은 것이 아니라, 팝의 황제에서 ‘성형의 황제로 거듭난’ 마이클 잭슨과 패션 트렌드를 추종하는 여학생의 사례에 내재한 외모지상주의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 양식과 그 한계를 논하라는 논제가 출제됐다.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는 예쁘게 보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죽음에 이르는 다이어트를 감행하고 살을 찢고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낸다. 이런 세태에 대한 비판은 ‘한 꺼풀의 살갗에 불과한 외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외모지상주의 비판에서 주로 문제삼는 것은 ‘예쁘게’인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해 ‘보이고 싶다’는 열망에 초점을 맞춰보자.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거울(혹은 그와 유사한 매체)에 비친 상(像)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즉, 나의 외모를 보는 시선은 대부분 ‘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며, ‘나’는 ‘보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객체로서 존재한다. 이때 ‘나’는 어디까지나 객체일 뿐이므로 ‘나’의 외모를 평가하는 데 ‘나’의 주관은 배제된다. 오뚝한 콧날에 왕방울 같은 눈, 초승달 같은 눈썹과 도톰한 입술, S라인의 몸매 등 ‘미적 기준’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여 수익을 얻기 위한 상업주의와 이에 영합한 대중매체의 주장에 대한 무비판적 동의 내지 순응일 뿐 ‘나’만의 미적 기준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예쁜 외모에서 오는 만족감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예쁘게 보아주는 그 시선에서 오는 만족감일 뿐이다. 즉, 타인의 시선이 ‘나’로 하여금 성형과 다이어트를 권하고 강요하는 셈이다.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서 ‘나’는 없고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몸뚱이만 존재할 뿐이며, 이는 지독한 인간소외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간소외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것은 이들이 (예쁜) 몸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숭배는 몸에 대한 학대(성형수술과 다이어트)로 나타난다. 몸을 숭배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몸을 학대하다니 역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들이 숭배하는 것은 예쁜 타인의 몸이며 그처럼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예쁜 몸을 숭배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행위에는 동질화의 욕구가 숨어 있다. 자신도 모델, 탤런트처럼 완벽한 몸매와 예쁜 얼굴을 갖고 싶다는, 그럼으로써 주목받고 싶다는 욕구 말이다.
성형과 다이어트에 내재한 욕구가 이런 동질화뿐이라면 살을 찢고 뼈를 깎으며 무리한 다이어트로 죽음으로 치닫든 말든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체적 자유에 해당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동질화 욕구 뒤에 도사린 차별화 욕구를 간파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영화에서 한나가 전신 성형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 ‘드레스 사건’은 한나와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려는 아미의 차별화 욕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영화 속의 아미처럼 비열한 자기과시를 위한 차별화를 시도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통해 타인과의 차별화를 거쳐 좀더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비열한 자기과시를 배제한다면 성형과 다이어트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유용하다고 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차별화의 욕구는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으로 이어지고, 성형과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으로 나타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능이며, 선망의 대상에 대한 동질화 욕구는 정체성 형성의 한 방법이다. 동질화 욕구의 이면인 차별화의 욕구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외모는 경쟁력이며 ‘가장 예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지 않던가.
그러나 특정한 미적 기준을 절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다원화된 가치가 공존하는 현대사회와는 부합하지 않으며, 주체적 판단이 결여된 동질화의 추구는 자아 정체성의 부재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타인의 삶을 억압하여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부당한 차별화는 용납될 수 없다.
미에 대한 추구, 외모지상주의에 내재한 동질화와 차별화 욕구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필요한 미덕은 절제와 균형이다. 영화 속 한나의 식탐은 무절제의 전형이며, 한나에서 제니로의 환골탈태는 극과 극을 오가는 불균형의 전형이다. 인간을 품위 있게 하는 여러 요소들-예컨대 겸손, 지식, 친절함, 관용 등-사이의 균형과 자신의 주관과 타인의 시선 사이의 균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균형으로부터 절제의 미덕도 함께 발휘된다면, 적어도 성형 중독이나 다이어트에 의한 죽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