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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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 집에 부채질 ‘EU의 위기’

브뤼셀 정상회담 위기 타개책 합의 실패 … 중기예산안 각국 첨예한 의견 차이만 확인

  • 케임브리지=안병억 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5-07-07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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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난 집에 부채질 ‘EU의 위기’

    5월29일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부결되자 파리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겸허한 자세로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7월부터 6개월 동안 EU 정상회담과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을 맡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6월 말 유럽의회에서 EU의 현주소를 이렇게 진단했다.

    5월 말 프랑스가 유럽연합 헌법조약(이하 헌법안)을 거부한 데 이어 네덜란드도 이를 거부했다. 6월 중순 25개 회원국 정상들이 브뤼셀에 모여 위기 타개책을 논의했으나 이렇다 할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킨 꼴이 되었다. 과연 EU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정상회담이 합의에 실패한 이유와 후반기 합의 가능성, 헌법안의 미래를 진단해보자.

    중·동부 10개국 가입 후 첫 편성

    지난 정상회담의 쟁점사항은 2007년에서 2013년까지의 EU 중기예산안에 대해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었다. UN 같은 국제기구의 예산은 각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EU 예산은 각 회원국이 경제 규모에 맞게 내는 분담금 이외에 공동 정책의 시행으로 발생하는 재원이 예산으로 충당되어 ‘자체 예산’으로 불린다. EU는 회원국 농민의 농산물을 보장된 가격에 사주고 친환경적인 농업을 지원해준다(공동농업정책). 또 회원국 간에는 관세가 없는 대신 비회원국의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매긴다(공동통상정책). 그뿐 아니라 이런 관세와 함께 각 회원국이 부가가치세의 1%를 EU의 예산으로 낸다. 올해 EU 예산은 1060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28조원 규모다.



    해마다 예산을 두고 각 회원국과 EU의 행정부 구실을 하는 집행위원회, 예산을 심의 의결하는 유럽의회 간에 갈등이 빈번했다. 따라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8년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장이 보통 5~7년 정도 EU의 포괄적인 예산운영 계획을 담은 중기예산안을 만들어냈다. 공동농업정책과 저개발지역에 지원하는 구조기금 등 각 정책 분야별 예산 상한액을 규정했다. 몇 년 동안 EU 예산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고,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이번 중기예산안은 지난해 5월 체코와 폴란드 등 중·동부 유럽 10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한 뒤 처음 편성되는 예산으로 갈등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었다. 보통 신규 회원국에는 5~7년의 과도기를 주고 점차 EU의 정책에 적응하게 한다. 그러나 신규 회원국 농민들은 이런 과도기를 되도록 줄이고 빨리 농산물 보조금을 받고 싶어한다.

    이처럼 예산을 쓸 곳은 많아졌다. 그러나 각 회원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예산납부금액을 서로 줄이려고 했다. 25개 회원국 가운데 최대의 경제대국인 독일의 실업률이 12%를 넘고 있으며, 프랑스도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따라서 EU에 가장 많은 예산을 납부해오고 있는 독일에서조차 EU에 대한 예산납부액을 줄여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 ‘EU의 위기’

    6월16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의회에 각국 정상들이 모였으나 위기에 놓인 유럽헌법을 구해내는 타개책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영국이 84년부터 유럽공동체로부터 받아온 예산환급금을 폐지하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5년간의 질긴 투쟁 끝에 영국이 원래 유럽공동체에 지불해야 하는 예산의 3분의 1만 내는 성과를 얻어냈다. 즉 납부하는 예산의 3분의 2를 돌려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산환급금(British Rebate)이라고 불린다.

    당시 유럽공동체 예산의 70%가 공동농업정책에 지불되었다. 영국은 영연방으로부터 수입하는 비중이 높아, 예산납부 규정에 따라 많은 돈을 유럽공동체에 냈다. 또 농민의 수가 적어 유럽공동체로부터 받는 지원이 적었다. 당시 영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9개 회원국 가운데 7위를 기록했다. 이런 특수 사정을 감안, 영국은 예산환급금을 얻어냈다.

    하반기까지 합의 도출 난항 예고

    예산환급금 폐지 혹은 삭감에 대해 영국의 태도는 단호하다. 전체 예산 가운데 공동농업정책에 들어가는 비율을 줄이고, 이 정책을 개혁하지 않는 한 절대 예산환급금을 줄일 수 없다고 버텼다. 공동농업정책의 개혁과 예산안 환급금 요구를 연계시킨 것이다.

    공동농업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 프랑스는 영국의 이런 연계전략을 강력 비판했다. 84년 영국 경제는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예산환급금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영국을 힐난했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프랑스·독일과 달리, 영국 경제는 연 3% 정도의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프랑스는 영국이 “연대감이 부족하다”고, 영국은 프랑스가 “국민투표 거부 이후 본질을 호도하려는 전술을 쓰고 있다”고 서로 비난했다.

    현재 EU 예산 가운데 42%가 공동농업정책에 사용된다.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돈은 10% 남짓이다. 경기 침체로 이 분야에 대한 지출을 늘려야 하지만 공동농업정책의 최대 수혜자인 프랑스에 영국의 이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중기예산안 합의는 7월1일부터 6개월 동안 EU 의장국을 맡은 영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해결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선 9월 독일에서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기독교민주당의 후보인 앙겔라 메르켈 당수가 현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를 이기고 독일 사상 최초로 여자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독일 총리가 바뀐다 하더라고 그동안 유럽통합의 견인차 구실을 해온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급변할 리는 없다. 즉 공동농업정책의 개혁을 요구하는 영국의 요구에 프랑스는 물론이고 독일도 쉽게 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올 하반기에 EU 중기예산안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EU는 더 큰 위기에 빠진다. 보통 4월1일부터 회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회기 시작 몇 달 전에는 예산안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감안할 때, EU는 앞으로도 이 문제들 두고 몇 차례의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 총리가 말한 정치적 지도력이 과연 얼마나 발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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