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주로 애프터서비스 하러 다녀요.”6월 말 개각과 함께 영화계로 돌아온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이자 감독은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11월17일 일본영화 페스티벌의 부대행사로 마련된 가와이 하야오 일본 문화청 장관과의 대담에 참석한 그는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전임 장관으로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11월12일부터 12월7일까지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영화 40년사’에 참석했다 막 돌아온 참이었고, 그 전에는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있었다.
언론 보도된 복귀작 제목은 “사실무근”
레저용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출근하고, 장관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절하는 관행을 ‘조폭 문화’에 비유하는 등 관료적 형식을 깨는 것에서부터 문화인들과 소통하기를 시도한 이창동 감독이었지만 전임 장관이라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장관직을 그만둘 때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날도 “장관 그만두니 좋은 점도 있고…”라며 추진했던 일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가와이 하야오 장관이 주최한 리셉션에서 공식적 답사는 문화관광부 관리에게 맡겨졌고 이창동 감독은 한때 부하직원이었을 그의 연설에 가장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가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 번 장관직을 거쳐간 인사에게는 대개 ‘장관님’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니지만, 이창동 감독을 ‘장관’이라 부르는 영화계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에 대한 관심사도 그가 언제, 어떤 작품을 통해 메가폰을 다시 잡을 것인가이다. 이미 일부 언론에 그가 ‘영화감독으로 복귀하면 경남 밀양에서 첫 촬영에 들어갈 것이며, 영화 제목은 밀양(密陽)을 영어로 옮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이라는 보도가 문화관광부 직원의 입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차기작에 대해 “내년엔 찍어야죠”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나도 그 제목은 신문 보고 처음 알았어요. 유언비어예요. 지금은 머릿속에서 굴리는 중이에요. 물도 고여야 뭘 하는 법이지요.”
그럼에도 애초 계획이 엎어지지 않는다면, 차기작은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를 만들면서 창립한 이스트필름(대표 명계남)이 기획할 것이며,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과 손잡고 제작하리란 것은 확실하다. 이 감독의 동생인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도 “나우필름보다는 오래 인연을 맺고 있는 이스트필름에서 차기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의 복귀를 접하는 영화계 분위기는 미묘하다. 그가 장관직을 그만두기 직전 스크린쿼터 축소 의지를 밝혀 영화계가 발칵 뒤집힌 바 있고, 그가 스크린쿼터 축소 대신 영화계에 제시한 예술영화 의무상영제(‘마이너리티 쿼터제’) 안이 정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계 내부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장관 재직 때 자신이 제안한 제도의 혜택을 받거나 혹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비난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관 시절 스크린쿼터 축소 뜻을 천명한 데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이 엇갈리며, 이 감독 자신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부 장관이 아닌 만큼 노무현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총대를 메고 영화계를 배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한미 관계에서 쿼터 축소를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비상업적 영화에 대한 지원이라는 ‘마이너리티 쿼터제’를 나름대로 신경 써서 영화계에 챙겨준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발언 탓 ‘미묘한 시선’
어느 쪽이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영화계는 몹시 당황했다. 한때 이창동 감독은 스크린쿼터 사수 대오에서 가장 첫 번째 줄에 있었다. 이창동 장관의 발언 직후 열린 비상대책회의는 이창동 감독 비판파와 수용파로 갈라져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갈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다. 대책회의 결과가 스크린쿼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창동 ‘감독’에게는 ‘어떤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던 것만 봐도 영화인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이 이미 2003년부터 ‘영화계의 문제는 다양성을 가로막는 배급제와 엄청난 마케팅 비용’이라고 지적한 점, 이날 일본영화 페스티벌에서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낙차를 비교해보면 오히려 한국영화가 위에 있다. 미국에서 ‘한국영화 회고전’ 열린 것 봐라. 이건 매우 좋은 징조다”라고 말한 점 등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영화 ‘산업’을 보호하는 성격이 강한 스크린쿼터보다는 영화의 질적 우위를 통해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인들이 이창동 감독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나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생채기는 모두에게 남았고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행보를 애써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고 ‘지켜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를 ‘(전) 장관’이라 부르지 않고, 다음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간부가 “스크린쿼터 때문에 싸구려 저질 코미디 영화만 나온다”고 말하는가 하면, 재정경제부 차관보가 “영화계가 쿼터를 담보로 1500억원을 가져갔다”는 폭탄 발언을 해 영화인들의 분노가 재연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창동 감독으로서는 다시 영화인 진영에 서서 장관 시절 그가 뿌린 불씨를 바라보는 일이 마음 편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장관에서 물러난 뒤,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가 그를 앙드레 말로에 비유하면서 ‘권력이나 지성인인 양 행세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 밖’이라며 그의 말을 옮긴 것은 여전히 적절해 보인다.
“나는 글 쓰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그는 1983년 ‘전리’로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다). 난 늘 주변인이었으며, 장관직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이창동 감독은 11월12일부터 12월7일까지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영화 40년사’에 참석했다 막 돌아온 참이었고, 그 전에는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있었다.
언론 보도된 복귀작 제목은 “사실무근”
레저용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출근하고, 장관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절하는 관행을 ‘조폭 문화’에 비유하는 등 관료적 형식을 깨는 것에서부터 문화인들과 소통하기를 시도한 이창동 감독이었지만 전임 장관이라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장관직을 그만둘 때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날도 “장관 그만두니 좋은 점도 있고…”라며 추진했던 일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가와이 하야오 장관이 주최한 리셉션에서 공식적 답사는 문화관광부 관리에게 맡겨졌고 이창동 감독은 한때 부하직원이었을 그의 연설에 가장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가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 번 장관직을 거쳐간 인사에게는 대개 ‘장관님’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니지만, 이창동 감독을 ‘장관’이라 부르는 영화계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에 대한 관심사도 그가 언제, 어떤 작품을 통해 메가폰을 다시 잡을 것인가이다. 이미 일부 언론에 그가 ‘영화감독으로 복귀하면 경남 밀양에서 첫 촬영에 들어갈 것이며, 영화 제목은 밀양(密陽)을 영어로 옮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이라는 보도가 문화관광부 직원의 입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차기작에 대해 “내년엔 찍어야죠”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나도 그 제목은 신문 보고 처음 알았어요. 유언비어예요. 지금은 머릿속에서 굴리는 중이에요. 물도 고여야 뭘 하는 법이지요.”
김기덕 감독(아래 오른쪽)과 이창동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서 자주 만나는 한국의 대표 영화인이다.
이창동 감독의 복귀를 접하는 영화계 분위기는 미묘하다. 그가 장관직을 그만두기 직전 스크린쿼터 축소 의지를 밝혀 영화계가 발칵 뒤집힌 바 있고, 그가 스크린쿼터 축소 대신 영화계에 제시한 예술영화 의무상영제(‘마이너리티 쿼터제’) 안이 정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계 내부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장관 재직 때 자신이 제안한 제도의 혜택을 받거나 혹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비난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관 시절 스크린쿼터 축소 뜻을 천명한 데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이 엇갈리며, 이 감독 자신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부 장관이 아닌 만큼 노무현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총대를 메고 영화계를 배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한미 관계에서 쿼터 축소를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비상업적 영화에 대한 지원이라는 ‘마이너리티 쿼터제’를 나름대로 신경 써서 영화계에 챙겨준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발언 탓 ‘미묘한 시선’
어느 쪽이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영화계는 몹시 당황했다. 한때 이창동 감독은 스크린쿼터 사수 대오에서 가장 첫 번째 줄에 있었다. 이창동 장관의 발언 직후 열린 비상대책회의는 이창동 감독 비판파와 수용파로 갈라져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갈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다. 대책회의 결과가 스크린쿼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창동 ‘감독’에게는 ‘어떤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던 것만 봐도 영화인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이 이미 2003년부터 ‘영화계의 문제는 다양성을 가로막는 배급제와 엄청난 마케팅 비용’이라고 지적한 점, 이날 일본영화 페스티벌에서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낙차를 비교해보면 오히려 한국영화가 위에 있다. 미국에서 ‘한국영화 회고전’ 열린 것 봐라. 이건 매우 좋은 징조다”라고 말한 점 등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영화 ‘산업’을 보호하는 성격이 강한 스크린쿼터보다는 영화의 질적 우위를 통해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인들이 이창동 감독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나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생채기는 모두에게 남았고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행보를 애써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고 ‘지켜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를 ‘(전) 장관’이라 부르지 않고, 다음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간부가 “스크린쿼터 때문에 싸구려 저질 코미디 영화만 나온다”고 말하는가 하면, 재정경제부 차관보가 “영화계가 쿼터를 담보로 1500억원을 가져갔다”는 폭탄 발언을 해 영화인들의 분노가 재연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창동 감독으로서는 다시 영화인 진영에 서서 장관 시절 그가 뿌린 불씨를 바라보는 일이 마음 편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장관에서 물러난 뒤,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가 그를 앙드레 말로에 비유하면서 ‘권력이나 지성인인 양 행세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 밖’이라며 그의 말을 옮긴 것은 여전히 적절해 보인다.
“나는 글 쓰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그는 1983년 ‘전리’로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다). 난 늘 주변인이었으며, 장관직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