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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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감성’으 로 ‘세련된 화면’ 창조하다

‘로드 무비’ ‘얼굴 없는 미녀’의 김인식 감독‘

  • 입력2004-11-18 1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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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적 감성’으 로 ‘세련된 화면’ 창조하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의 김인식 감독 모습

    시인 하재봉에게 영화감독 지망생 김인식을 소개해준 사람은 시인 유하다. 1993년이었다. 당시 김인식과 유하, 그리고 나에게 영화는 밥벌이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유하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시인 진이정과 함께 각색한 뒤 감독으로 데뷔했고, 나는 KBS-TV ‘전국은 지금’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맡아 본격적으로 영화평론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인식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그보다 10년이 더 지난 뒤였다.

    유하가 김인식을 데려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파리의 영화학교 ESEC(으젝)을 졸업한 그는 졸업 후에도 파리의 나이트클럽이나 시네마테크를 근거지로 유랑하다가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김호선 감독에게 돌아갔고, 실패했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 사설에까지 등장했던, 한국의 신세대 감성을 대표하는 소설과 50대 영화감독의 감성 사이에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인생에서 가정법이 적용될 수는 없지만, 반성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수단은 될 수 있다. 만약 김인식이 그 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했다면? 나는 그가 장선우 감독과 함께 1990년대 한국 영화의 한 축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유하가 김인식을 나한테 소개했을 때, 김인식은 ‘아담이 눈뜰 때’가 무산되자 그동안 쓴 소설을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 해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단숨에 원고를 읽었다. 문장은 조금 거칠었지만, 내러티브는 힘있게 전개되었고 무엇보다 캐릭터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 기대하게 만드는 빛나는 감성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내 고등학교 후배라는 것을 알았다. 김인식의 첫 소설 ‘어디에서나 슬픔은 반짝인다’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승자 시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차용한 그 소설은, 김인식이라는 예술가의 감성을 세상에 신고한 작품이었다.

    95년 두 권으로 출간된 내 소설 ‘쿨재즈’의 영화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감독으로 김인식을 추천했다. 그러나 그 기획은 몇 군데 영화사를 전전하다가 끝내 무산되었다. 우리는 투자를 받기 위해 같이 제작자를 만나러 뛰어다니기도 했다. 데뷔하기까지 김인식은 더 많은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는 말을 나는 열 번 가까이 들었다. 한번은 그가 시나리오를 쓰는 호텔에 간 적도 있다. 그는 노트북 컴퓨터와 프린터까지 호텔 방에 놓고 프로듀서와 함께 시나리오의 마지막 탈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레일 패스’ ‘ 바이올렛’ ‘테크노’ 등이 그렇게 레디 고 직전까지 갔던 영화들이다. 또 한번은 ‘댄스 댄스 댄스’라는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고, 한국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의 박스기사에까지 나왔다. 나는 그날 축하전화를 했는데 물론 그 작품들은 모두 중간에 엎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로드 무비’가 나왔다. 세계 영화계에서 아시아 영화에 가장 정통하다고 알려진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오해받은 걸작이며 미래의 고전’이라고 ‘로드 무비’를 극찬했다. 그 영화는 밴쿠버영화제, 로마영화제 등 10여개 해외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김인식에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안겨주었다.

    ‘예술적 감성’으 로 ‘세련된 화면’ 창조하다

    그의 영화 ‘얼굴 없는 미녀’와 ‘로드 무비’(위부터).

    나는 10년 전 그의 소설에서 느꼈던 직관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각각의 쇼트는 매우 뛰어난 미학적 쾌감을 준다. 지금까지 이렇게 뛰어난 장면 연출력을 보여준 한국 감독은 없었다. ‘로드 무비’의 화면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 슈퍼 16mm로 찍어서 디지털로 바꾼 다음, 극장 상영시 다시 35mm 필름으로 바꿨기(키네코) 때문이다. 그 느낌은 펀드 매니저였다가 주가 폭락으로 부랑아 생활을 하는 주인공 석원의 황량한 내면과 닮아 있다. 산악인이었다가 자신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동성애 성향을 깨닫고 노숙자 생활로 전락한 대식이 석원을 사랑하면서 남자 동성애 문제를 핵심 소재로 끌어들인 ‘로드 무비’는,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는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제안한 아이템이었다. 그는 2000년대엔 우리나라에서도 게이 무비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이 아이템을 제의했고, 김인식은 처음에 거절했다가 나중에 받아들인 뒤 1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게이 무비라고 알려지면서 캐스팅에 어려움이 있었다. 캐스팅이 안 되니까 펀딩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엎어지나 생각하고 있을 때, 정찬과 황정민이 캐스팅에 응했다.

    순제작비 8억원, 홍보비 포함해서 15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제작비 대비 가장 고급스러운 화면을 만들어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화면은 문학과 미술을 했던 김인식의 예술적 감성에 의해 가능했다.

    김인식의 두 번째 작품은 ‘로드 무비’를 눈여겨본 김혜수의 러브콜이 시작되면서 ‘얼굴 없는 미녀’로 급물살을 탔다. 김인식의 컴퓨터에는 수십 편의 시나리오가 숨겨져 있지만, 이미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얼굴 없는 미녀’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것은 김혜수가 캐스팅된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김혜수는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했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딱히 기억될 만한 영화가 없었다. 그러나 ‘얼굴 없는 미녀’로 비로소 연기자 김혜수를 알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단으로부터 거의 고르게 호평받은 ‘로드 무비’와는 달리 ‘얼굴 없는 미녀’에 대해서는 평가가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이미지의 과잉이다. 그는 소득수준 10만 달러 정도를 가정하고 만든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비판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여주인공의 거주 공간이나 그녀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의 공간은 매우 세련된 화면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관객들에게 쉽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하는 관객을 보고 그는 당황스러워했다. 관객들이 뇌의 칼로리를 소비해가면서 적극적으로 영화 보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얼굴 없는 미녀’는 11월12일부터 열린 이탈리아 토리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토리노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각색상, 민병훈 감독의 ‘벌이 날다’가 대상을 받으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김인식과의 이 인터뷰는 그가 토리노로 출국하기 이틀 전,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인 ‘러브 바이러스’를 탈고한 날 밤에 이루어졌다.

    ‘러브 바이러스’는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과 홍콩을 배경으로, 짝사랑에 실패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봄에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끔찍한 결말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얼굴 없는 미녀’를 만든 뒤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수정했다. 김인식은 ‘얼굴 없는 미녀’를 만들면서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털어버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좋은 영화는 감독 자신의 정서를 치유하는 기능까지 한다.

    ‘러브 바이러스’는 스타일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인물들의 내면을 이미지로 드러냈던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르게 다이얼로그가 많고 배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로드 무비’가 자연친화적으로, ‘얼굴 없는 미녀’가 인공적 세트에서 만들어졌다면, 핸드 헬드 카메라를 적극 이용해서 새로운 방식의 연출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영화에 투자한 제작자를 위해 적어도 손익분기점을 넘게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으므로 흥행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자기 목소리를 잃을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은,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영화산업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결연한 의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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