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로 비탈진 사찰 경내가 가득 찼다.
청량산은 일찍이 퇴계 이황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퇴계의 5대조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봉산(封山)이다. 이런 인연으로 퇴계는 13살 때 처음 청량산을 찾은 이래로 괴나리봇짐을 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이곳을 찾아와 독서를 했다. 55살 때는 한 달 동안 이 산속에 머물기도 했다. 이곳을 아끼는 퇴계의 마음은 그의 시조에 잘 담겨져 있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어찌하랴만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뱃사공 알까 하노라.’
퇴계가 이렇게 비장(秘藏)했던 곳이거늘, 섭섭하게도 청량사 음악회가 소문을 다 내고 말았다.
청량사는 한때 33채의 부속건물을 거느린 큰 사찰이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며 규모가 줄어 현재는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잡은 옹색한 절에 지나지 않게 됐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바위 봉우리가 아름다운 청량산을 보기 위해서지, 청량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량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건물 오산당(吾山堂)이 유명하고, 산속의 김생굴이 더 유명했다. 오산당은 퇴계가 독서를 하던 공간으로, 퇴계가 ‘이 산의 주인은 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김생굴은 신라 명필 김생이 공부하던 굴이다.
탑 앞마당에 마련한 산사음악회 무대.
오후에 비가 와서 사람들이 적을 줄 알았는데 청량사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간신히 자리잡은 법당 주변으로 대추나무에 대추 열리듯 사람들이 얹혀 있었다. 엉덩이를 댈 수 있는 맨땅이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는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 옆에 돗자리를 간신히 펼 수 있었다. 비록 화장실 냄새가 풍겼지만, 석탑 옆에 설치된 무대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날 음악회의 주제는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이었다. 청량사 주지인 석지현 스님은 “탄핵, 테러, 연쇄살인… 그간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부끄럽게 했던 이 모든 것들을” 버리기 위해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행사를 준비했다고 인사했다.
불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원불교의 교무,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 이노주사(이렇게 노래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함께 만든 자리였다. 그리고 대중음악인 장사익과 국악인 박애리씨가 함께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7시 청량사에 머물고 있는 승려 운산의 대금 연주로 음악회가 시작되고, 승려 법능과 심진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자 산사는 순식간에 내가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최고의 음악당으로 변해 있었다.
(좌)유리보전 앞에 모인 청중. (우) 숲 속에 든 청량사.
그런데 사찰에서 사이키 조명이라니! 게다가 우렁찬 노랫소리라니! 그리고 격렬한 박수와 앙코르 요청 소리까지! 종교음악의 세계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는 행위가 이어졌다.
속삭이듯 가만가만 입을 열어 노래하는 정율 스님.
게다가 이 음악회에 초대받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무대 뒤편의 산능선, 그 너머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비쭉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칼날처럼 번쩍이는 초승달의 눈빛이, 산을 넘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했다.
앞사람에 가려 무대는 보이지 않고, 너무 멀어 노래하는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량산이 소리를 모아주니 좋았다. 하늘을 보니 조명을 받아 환하게 웃는 나뭇잎들, 그리고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도 보였다. 음악과 자연과 종교와 내가 하나 되는 멋진 자리였다.
청량사 가는 길에 들른 봉화 닭실마을의 권충재 고택.
인파에 쓸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는 것이 두려워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장사익의 화통한 노랫가락이 아련해질수록 가을 풀벌레와 개울물의 합창소리가 가까워졌다. 순간 세상 모든 소리가 음악소리로 번져왔다.
산사음악회는 법당 마당에서만 펼쳐진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