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 모스크바 크렘린 영빈관 접견실. 사실상 러시아 방문 마지막 날인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 언론사 특파원 6명을 만났다. 기자간담회가 아닌 접견 형식의 면담이었다.
노대통령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지친 모습의 대통령을 예상했던 특파원들로서는 ‘뜻밖’이었다. 사실 노대통령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전에 없는 ‘빡빡한 일정’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을 거쳐 9월20일 오후 모스크바에 도착한 노대통령은 이날 밤 갑자기 교외로 나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을 했다. 러시아 측의 요청으로 급하게 이뤄진 만남이었다.
다음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시차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노대통령은 정상회담, 공식만찬, 모스크바대학 강연 등 분(分) 단위로 짜여진 공식·비공식 일정을 수행했다. 도시락으로 식사를 때워가며 대통령 일정을 쫓은 수행기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일정에 쫓기다보니 노대통령은 이따금 집중력을 잃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이날, 특파원들과 만난 노대통령은 ‘피로쯤은 까맣게 잊을 정도’로 러시아 방문 성과에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한국과 러시아가 이번에 합의한 내용은 새로운 사항이 별로 없다. 에너지와 철도, 우주항공 분야, 과학기술 협력, 군사기술 협력, 철도 연결 등의 사안은 한·러 정상회담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역시 이 ‘단골메뉴’가 반복됐다.
두 정상 대화 스타일도 비슷
하지만 노대통령은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푸틴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두 정상은 지난해 10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외교 당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방문 일정이 몇 차례 연기되면서 러시아 측과 신경전까지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러시아에서 너무 ‘무명’이라는 사실도 부담이었다. 오랜 정치 경력을 가진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전부터 러시아를 드나들며 현지에 인맥을 쌓았고 인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번 방문 직전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이 ‘대한민국 이회창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오보를 내놓았다가 우리 정부의 항의로 급히 정정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이러한 우려를 모두 씻고 전에 없이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끝났다. 정태익 주(駐)러시아 대사가 “(노대통령이) 4강 지도자 중 푸틴 대통령과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두 대통령이 서로 ‘통한’ 것은 9월20일 비공식 만찬에서부터다. 두 정상은 통역만 배석시킨 채 3시간 가까이 단독으로 얘기를 나눴다. 북핵 문제 등 한반도 정세와 경제협력 등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놓고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
말수가 적은 푸틴 대통령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언급하는 스타일. 직설적인 성격의 노대통령과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 없이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노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스타일이 아주 편했다”고 말했다.
두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쉽게 꺼내기 어려운 민감한 문제도 피해가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먼저 정상회담 직전 불거진 한국의 ‘핵 추출실험’ 사안부터 꺼냈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일본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갖추고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국제사회의 과잉 반응”이라고 해명했다.
공식만찬서 노대통령 애창곡 연주 ‘배려’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북한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에 노대통령은 “북한이 아직 한국에 도움받을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응수했다.
또 푸틴 대통령이 “미국이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니냐”고 슬쩍 떠보자, 노대통령은 “그게 본질이 아니다”고 바로잡으면서도 “개성공단에 펜티엄 컴퓨터도 못 들여간다”고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전략물자 제한규정’ 때문에 개성공단에 펜티엄Ⅲ급 컴퓨터도 반입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 것.
노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앞으로 깊이 있는 얘기가 가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만족해했다. 한 특파원이 노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의 직설적인 화법은 그가 대중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묻자 노대통령은 “모호한 말로 진의를 흐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정치적인 것 아니냐”며 칭찬했다.
두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공부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구체적인 통계수치까지 들이대며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 왜 러시아에는 투자하지 않느냐”고 따져 노대통령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노대통령도 러시아에 관한 책 두 권을 골라 탐독했다. 두 차례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일간지 논설위원이 쓴 책과 러시아 대사관 근무 경험이 있는 정부 부처 공무원이 쓴 책이었다.
러시아 측은 노대통령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 9월21일 크렘린에서 열린 공식만찬에서는 크렘린 실내악단이 ‘아침이슬’과 ‘선구자’ ‘부산갈매기’ 등 노대통령의 애창곡을 연주했다.
러시아 측은 회담 준비과정에서 우리 외교 당국에 노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의 악보나 음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준비에 바빴던 우리 정부는 ‘애국가’ 악보만 달랑 보내줬다고 한다. 당황한 러시아 측은 ‘사적인 채널’을 통해 ‘아침이슬’ 등을 MP3 파일로 전달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지막으로 의전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노대통령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에피소드 하나. 수행한 우리 경제인들과의 간담회에서 건배를 들 때다. 다른 참석자들은 샴페인을 들었는데 노대통령만 혼자 포도주를 들었다. 잠시 뒤 ‘실수’를 깨달은 노대통령은 다시 한 번 건배를 제안했다. 눈 밝은 독자들은 당시 사진을 보면서 노대통령 혼자서만 적포도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노대통령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지친 모습의 대통령을 예상했던 특파원들로서는 ‘뜻밖’이었다. 사실 노대통령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전에 없는 ‘빡빡한 일정’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을 거쳐 9월20일 오후 모스크바에 도착한 노대통령은 이날 밤 갑자기 교외로 나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을 했다. 러시아 측의 요청으로 급하게 이뤄진 만남이었다.
다음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시차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노대통령은 정상회담, 공식만찬, 모스크바대학 강연 등 분(分) 단위로 짜여진 공식·비공식 일정을 수행했다. 도시락으로 식사를 때워가며 대통령 일정을 쫓은 수행기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일정에 쫓기다보니 노대통령은 이따금 집중력을 잃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이날, 특파원들과 만난 노대통령은 ‘피로쯤은 까맣게 잊을 정도’로 러시아 방문 성과에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한국과 러시아가 이번에 합의한 내용은 새로운 사항이 별로 없다. 에너지와 철도, 우주항공 분야, 과학기술 협력, 군사기술 협력, 철도 연결 등의 사안은 한·러 정상회담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역시 이 ‘단골메뉴’가 반복됐다.
두 정상 대화 스타일도 비슷
하지만 노대통령은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푸틴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두 정상은 지난해 10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외교 당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방문 일정이 몇 차례 연기되면서 러시아 측과 신경전까지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러시아에서 너무 ‘무명’이라는 사실도 부담이었다. 오랜 정치 경력을 가진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전부터 러시아를 드나들며 현지에 인맥을 쌓았고 인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번 방문 직전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이 ‘대한민국 이회창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오보를 내놓았다가 우리 정부의 항의로 급히 정정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이러한 우려를 모두 씻고 전에 없이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끝났다. 정태익 주(駐)러시아 대사가 “(노대통령이) 4강 지도자 중 푸틴 대통령과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두 대통령이 서로 ‘통한’ 것은 9월20일 비공식 만찬에서부터다. 두 정상은 통역만 배석시킨 채 3시간 가까이 단독으로 얘기를 나눴다. 북핵 문제 등 한반도 정세와 경제협력 등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놓고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
말수가 적은 푸틴 대통령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언급하는 스타일. 직설적인 성격의 노대통령과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 없이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노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스타일이 아주 편했다”고 말했다.
두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쉽게 꺼내기 어려운 민감한 문제도 피해가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먼저 정상회담 직전 불거진 한국의 ‘핵 추출실험’ 사안부터 꺼냈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일본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갖추고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국제사회의 과잉 반응”이라고 해명했다.
공식만찬서 노대통령 애창곡 연주 ‘배려’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북한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에 노대통령은 “북한이 아직 한국에 도움받을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응수했다.
또 푸틴 대통령이 “미국이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니냐”고 슬쩍 떠보자, 노대통령은 “그게 본질이 아니다”고 바로잡으면서도 “개성공단에 펜티엄 컴퓨터도 못 들여간다”고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전략물자 제한규정’ 때문에 개성공단에 펜티엄Ⅲ급 컴퓨터도 반입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 것.
노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앞으로 깊이 있는 얘기가 가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만족해했다. 한 특파원이 노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의 직설적인 화법은 그가 대중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묻자 노대통령은 “모호한 말로 진의를 흐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정치적인 것 아니냐”며 칭찬했다.
두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공부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구체적인 통계수치까지 들이대며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 왜 러시아에는 투자하지 않느냐”고 따져 노대통령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노대통령도 러시아에 관한 책 두 권을 골라 탐독했다. 두 차례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일간지 논설위원이 쓴 책과 러시아 대사관 근무 경험이 있는 정부 부처 공무원이 쓴 책이었다.
러시아 측은 노대통령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 9월21일 크렘린에서 열린 공식만찬에서는 크렘린 실내악단이 ‘아침이슬’과 ‘선구자’ ‘부산갈매기’ 등 노대통령의 애창곡을 연주했다.
러시아 측은 회담 준비과정에서 우리 외교 당국에 노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의 악보나 음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준비에 바빴던 우리 정부는 ‘애국가’ 악보만 달랑 보내줬다고 한다. 당황한 러시아 측은 ‘사적인 채널’을 통해 ‘아침이슬’ 등을 MP3 파일로 전달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지막으로 의전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노대통령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에피소드 하나. 수행한 우리 경제인들과의 간담회에서 건배를 들 때다. 다른 참석자들은 샴페인을 들었는데 노대통령만 혼자 포도주를 들었다. 잠시 뒤 ‘실수’를 깨달은 노대통령은 다시 한 번 건배를 제안했다. 눈 밝은 독자들은 당시 사진을 보면서 노대통령 혼자서만 적포도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