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8월15일 오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 행사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S씨의 마음이 최근 어수선해진 까닭은 큰아버지가 조선총독부에서 일했고, 아버지가 해방 후 경찰에 투신했기 때문이다. S씨는 정치인 아버지들의 일제강점기 행적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싶었다고 한다. 그는 “월북자라는 의심을 받으면 독립운동가가 친북세력이 되고, 식민지 기관에서 일한 전력만으로 친일파라는 덫을 씌울 수 있다”면서 “과거사 규명이 망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 문제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국민 여론도 엇갈린다. S씨처럼 ‘여론 재판’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62%에 달하는 국민이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과거사 논쟁은 8월23일부터 5일간 열린 임시국회와 9월 시작되는 정기국회의 뜨거운 감자다. 여야는 과거사 정리를 담당할 기구의 위상, 조사 대상, 조사 범위, 국회입법 지원 여부를 놓고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다.
국민 62% “과거사에 대한 정리 필요하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체성을 물으면서 불씨에 부채질을 한 과거사 논쟁은 노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사 청산기구 구성을 제안하면서 불뿜기 시작했다. 광복절 직전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일각에선 노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관련해 경제에 초점을 맞춘 ‘다이내믹 코리아’가 주제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경제 문제가 경축사의 주요 이슈가 돼야 한다는 주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과거사 정리에 초점을 맞췄다. 노대통령은 경제는 중장기적으로 접근할 문제로 즉시 효과를 나타낼 처방이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노대통령이 과거사 문제를 통한 특유의 ‘정면 돌파’로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노대통령의 강공 드라이브 이후 과거사 정국은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의 ‘신기남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는 특종 보도로 신기남 전 의장이 낙마했으며, 차기 대권주자군 중 한 사람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 아버지의 일제강점기 행적과 관련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게다가 인터넷에선 정치인 아버지들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봇물처럼 터져나와 과거사 논쟁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당은 과거사 규명과 관련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당 신 전 의장이 8월1일 발표한 ‘진실과 화해 그리고 미래위원회’의 명칭도 남아공의 과거 청산 기구에서 따왔다. 남아공은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이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해 과거사를 정리했다. 남아공 의회가 95년 7월 ‘국가통합 및 화해촉진법’을 제정하면서 만들어진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보복을 배제해 성공적인 과거 청산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나 범죄 사실 고백과 사면청문회를 거치며 가해자들이 적지 않은 곤욕을 치렀다.
과거사 청산의 기수를 자임한 열린우리당 이부영 신임의장.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와 의문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우리당 민주노동당 민주당의 견해와 친북·용공 행위에 대한 조사를 강조하는 한나라당이 어느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을지는 미지수다. 청산 기구에 조사권을 부여하는 문제도 여야의 주장이 엇갈린다. 한나라당 임태희 대변인은 8월21일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사 문제는 역사적·학술적 접근에 맡기고, 국회는 민생 경제 살리기에 주력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당 한 관계자는 “친북, 용공을 조사 대상에 넣자는 주장은 전형적인 물타기”라면서 “청산 기구에 조사권을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우리당, ‘진실과 화해위원회’ 남아공서 벤치마킹
우리당은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정권의 입김을 받지 않는 독립기구가 돼야 한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을 사실상 받아들였고, 친북·용공 조사 여부도 “협의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개정안,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3기) 등을 아우르는 과거사 규명과 관련된 통합 입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 ‘과거사 통합입법 태스크포스(TF)팀’은 통합 입법에 대한 내부 반대와 “입법은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받아들여 ‘과거사 진상규명 TF팀’으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우리당은 무엇보다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밀어붙일 태세다. 김희선 의원이 대표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은 조사 범위를 군인의 경우 기존 법안의 ‘중좌’에서 ‘소위’ 이상으로 확대했고 ‘문화, 언론 분야 식민통치 적극 협력자’를 새로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다. 한나라당은 개정안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조사 대상에 포함된다. 우리당은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3기)의 조사 범위를 5·16쿠데타까지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노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기폭제로 강공 드라이브에 나선 우리당에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지방분권, 정부혁신, 사법개혁을 가장 중요한 국정 주제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데 왜 뒤로 가느냐”는 여론이 확대된다면 노대통령이 지방분권 정책 등에서 힘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은 과거사 문제에 관련해 ‘못할 것 없다’는 태도에서 조금씩 후퇴하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사 문제는 한나라당으로선 난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지난 총선을 통해 5·6공 색채를 어느 정도 걷어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용공·친북 세력에 대한 조사를 계속 강조할 경우 ‘냉전 수구세력’ 이미지를 다시 끌어안아야 한다. 비주류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한 의원은 정체성 논쟁 당시 “유신 잔당의 이미지를 버리지 않으면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