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려권은 내용이나 모양, 크기 등에서 한국의 여권과 차이가 없다. 여권에는 동반자와 유효기간, 통관지, 발급날짜가 표시돼 있다. 려권을 가진 사람을 ‘지장이 없이 통과시켜 주고’ ‘편의를 제공하라’는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북한 려권은 최근까지 외교관이나 공무가 있는 군인 또는 중국 친척 방문 목적을 가진 일반인에게만 발급돼왔다. 일반인의 경우 토대(출신성분, 당성) 심사에 문제가 없고, 중국 국적을 가진 8촌 이내의 친척이 정식 초청을 했을 때만 려권이 발행됐다. 그동안 북한의 려권이 일부 권력자의 전유물로 취급돼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에 머물며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는 탈북자들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이후 북한 려권이 출신성분이나 당성, 중국 친척 방문 여부와 관계없이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손쉽게 발급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북한 정식 려권을 가진 탈북자들은 두만강을 건너 밀입국하는 기존 탈북자와 달리 중국 공안측의 검문검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욱이 려권을 받으면서 북한 내 중국대사관에서 관광비자까지 함께 받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중국 내를 옮겨다니고 있는 상태. 려권을 가진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정권이 외화벌이나 식량 확보를 위해서라고 하면 조건 없이 려권을 발급하고 있다”며 “ 주민 이동의 통제와 이주 제한 정책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예전엔 심사 까다롭고 뇌물도 필수”
지난 1월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 베이징시에 머물고 있는 김모씨(42)의 증언은 북한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예전에는 국가보위부에서 직접 토대에 대한 심사를 하고 중국에 친척이 있는지 여부, 진짜 친척을 만나러 가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설사 중국 친척 방문 등의 핑계를 대고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려권 발급 관리에게 뇌물을 써야 했기 때문에 일반인은 려권을 발급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재봉기나 TV, 양복감을 선물로 주는 게 관행처럼 돼 있었지만 배가 고파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뇌물을 준비하겠는가. 한마디로 일반인이 려권을 가지고, 그것도 관광비자를 받아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주변에서 려권을 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어보니 국가가 지정한 여행사에 가 ‘식량 구하러 중국 간다’고 하면 무조건 려권을 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해봤더니 신기하게도 려권이 바로 나오더라. 보위부에서 오라 가라 연락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김씨는 더욱이 큰아버지 가족이 6·25 전쟁 때 월남한 바람에 북한에서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된 인물이었다.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을 정도. 하지만 김씨는 려권을 내는 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당국의 조사도 받지 않았다.
단수 아닌 복수려권 ‘파격적 혜택‘
심지어 이렇게 발급한 려권과 비자를 가지고 중국으로 왔다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다시 북한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외국에 다녀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려권을 반납하고, 외국에 다시 나갈 때 려권을 재발급받아야 했던 관행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2002년 7월 이후 북한은 려권을 남한의 여권처럼 발행하면 3개월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이 때문에 일부 탈북자들은 중국으로 와 거처를 마련해두고 다시 북한에 들어가 가족들까지 데리고 나오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3월 중 주중(駐中)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탈북자 이모씨(42·베이징 거주)는 “몇 달 동안 먹을 식량을 마련해 들어가 이번에는 부인과 함께 나가겠다고 했더니 부인의 려권도 아무런 의심 없이 만들어줬다”며 “두 명의 아이들도 내 려권 동반자란에 이름을 올려줘 북한을 빠져나오는 것은 물론 중국에 머무는 데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남한으로 치면 한 번 내면 여러 차례 사용할 수 있는 복수여권에 해당되는 셈. 이제 이씨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한 걸림돌이 있다면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는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뿐, 이씨가 거사 시점을 이달 중으로 잡은 것은 여권과 비자 만료시점이 3월 말까지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일반인용 복수려권은 남한으로 건너온 대다수 탈북자들이 단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한 단수여권만을 받을 수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가 단수여권을 받으려면 여행목적과 관련해 수개월간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최근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북한 전문가 김모씨(34·1993년 7월 탈북)는 “중국 체류 탈북자들 중 많은 수가 북한 내를 옮겨다닐 수 있는 통행증(여행증)이 아니라 려권과 중국 관광비자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려권 모양도 남한의 여권과 비슷하게 바뀐 것 같다”고 밝혔다. 실제 ‘주간동아’의 확인취재 결과 북한의 일반 복수려권은 남한의 여권과 모양, 크기, 차례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표지 색깔만 붉은색으로 초록색인 남한의 여권과 차이를 보이고 있을 따름이다(사진 참조). 북한의 일반 복수려권이 남한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의 일반 려권 발급 자유화에 대해 탈북자단체와 국가정보원은 “믿을 수 없다”거나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탈북자동지회 김순명 총무는 “혹 통행증을 려권으로 잘못 본 게 아니냐”며 “북한의 려권은 당성이나 성분이 좋은 사람 중에서도 뇌물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나 발급되고, 그 수도 엄청나게 제한돼 있는데 려권 발급 자유화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총무는 만약 북한 내부에서 그런 조치가 단행됐다면 국가정보원이나 최근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이 모를 리 없다는 입장. 때문에 김총무는 “당성이 좋은 몇몇 사람이 려권을 돈 주고 사 탈북한 후 려권 발급이 자유화됐다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정보원도 “북한의 일반 려권 발급이 자유화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려권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려권 발급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고 반박한다.
결국 탈북자들의 증언을 아우르면 북한이 공식적으로 일반 려권을 완전 자유화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려권 발급에 대한 규제를 일부 풀었음이 확실하다. 과연 북한은 무엇 때문에 려권 발급에 대한 규제를 풀기 시작했을까?
탈북자들은 이를 “2002년 7월1일 발표된 이른바 ‘7·1’경제관리개선 조치가 만들어낸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7·1’경제관리개선 조치는 북한판 경제개혁 조치로, 이때부터 북한은 식량배급제를 폐지하고 종합시장을 만들었으며,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동시에 물가와 세금도 함께 인상했다. 문제는 임금이 오른 폭보다 물가가 몇 배로 더 올라 생필품과 식량을 구하기가 배급제 실시 때보다 더욱 어려워졌다는 점. 신의주 특구에 이어 금강산 특구, 개성공단 개발 등 일련의 개방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탈북행렬이 러시를 이룬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북한은 자본과 물자 부족, 인플레이션 등에 시달리며 물자와 외자, 식량을 구입할 수 있다면 주민들의 이동권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 시점이 바로 지난해 가을로 탈북자들이 말한 려권 자유 발행 시점이다.
때문에 탈북자 사회에서는 일반인에 대한 려권 발행을 북한 인권이 진일보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한 관계자는 “일반인에 대한 북한 려권의 발행은 전면적,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만성적인 식량난과 외화난,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려권 발행이 대규모 탈북행렬로 이어질 경우 려권 발급 중단조치와 함께 대대적인 단속과 탄압이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