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로 인해 10명 이상이 B형·C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주간동아’의 보도(424호)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런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는 2월25일 보건복지부에서 연 기자회견을 통해 “수혈 부적격 혈액의 유출로 B형 간염 양성자 4명과 C형 간염 양성자 5명이 발생했다”며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약속했다. 이 내용이 보도되자 ‘주간동아’와 시민단체, 적십자사 홈페이지에는 자신이 수혈에 의해 간염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2002년 3월까지 대학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는 김모씨(30ㆍ여)는 “직업 특성상 매년 두 차례씩 검사를 했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2002년 4월 출산 전후 한 차례씩 수혈을 받은 후 곧바로 C형 간염에 감염됐다”며 “수혈이 아니고서는 C형 간염에 걸릴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적십자사가 실시한 이번 추적조사 대상에 김씨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씨와 같은 경우가 적지 않자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들은 “적십자사의 이번 추적조사가 방대한 혈액사고 중 극히 일부분만 보여주기 위한 면죄부용 조사”라고 지적한다.
과연 수혈에 의해 간염에 감염된 사람이 9명밖에 없다는 적십자의 발표는 사실일까? 일단 적십자사의 보도자료를 보자.
11건 사고 2건 줄여 한 자릿수 맞추기
도대체 부적격 혈액의 유출로 간염에 걸린 사람은 몇 명일까? 수혈에 의해 간염에 걸렸다는 사람은 많은데 적십자사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부조리를 직접 조사하는 ‘행운’을 잡은 적십자사는 추적조사 발표 직전 수혈 감염자 수를 은폐, 축소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적십자사가 보도자료를 내기 직전 작성한 ‘수혈감염 추적조사에 관한 발표문’에는 ‘수혈자 검체 검사 결과 양성반응이 B형 간염 5건, C형 간염 5건 등 10건’이라고 분명히 적시돼 있다.(사진) 적십자사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10명이 맞지만 감염자 수를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줄이기 위해 9명으로 적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었다. 서울대 의대 조한익 교수와 간(肝)사랑동우회측은 “적십자사가 보도자료에서 ‘간염 가능성이 낮다’며 통계에서 뺀 2건의 경우, 드물기는 하지만 모두 B형 간염”이라고 밝혔다. 즉 총 11건의 수혈감염 사고가 발생한 것을 ‘드문 경우’라는 이유로 1건을 줄인 후 발표 직전 감염자 수를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바꾸기 위해 또 한 건을 감염자 수에서 뺀 것이다. 결국 ‘수혈에 의한 간염 감염자가 10명 이상’이라는 주간동아의 최초 보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셈이다. 추후 추적조사를 하기로 했지만 앞으로 이들 2명에 대한 배상과 치료비 지급 문제 등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번 추적조사에서 가장 큰 의혹은 혈액 중 혈장 성분으로 만드는 혈액제제에 대한 추적결과가 발표내용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헌혈 혈액이 들어오면 적십자사는 적혈구와 혈소판은 수혈용으로 병원에 공급하고, 혈장은 알부민·면역글로불린·혈우병치료제 등 혈액제제를 만들기 위해 각 제약사로 보낸다. 즉 감염 우려가 있는 수혈 부적격혈액(헌혈유보군·과거 전염병 양성반응 혈액으로 출고가 절대 금지된 혈액)을 수혈용으로 제공했다면 그 혈액에서 추출된 혈장도 혈액제제의 원료로 제약사에 공급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감염 우려가 높은 이 혈장이 적십자사의 혈장분획센터에서 재처리과정(분획)을 거치면서 수천, 수만 명분의 정상 혈장과 합쳐져 전체 혈액제제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혈액제제는 일반인은 물론 매일 이를 주사해야 하는 백혈병이나 골수이식, 혈우병 환자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의약품이다.
적십자사의 2월25일 기자회견 내용과 다른 내부문건. 수혈에 의한 간염 감염이 10건이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밑줄). 적십자사는 B형 간염 검사 결과 계속 양성으로 나온 사람이 단 한 번 음성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이를 혈액제제(분획)의 원료로 출고했다.
적십자사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분획과정을 거쳐 제약사로 출고되기 전 검체 상태로 보관된 문제 혈장에 대한 핵산증폭검사를 다시 실시한 결과 모두 음성으로 나왔고, 이중 의심스러운 일부 건에 대해 완제품 검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추적조사를 완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 국내 혈액제제 생산 제약사 두 곳은 2002년 7월부터 2003년 8월까지 1년여 동안 모두 2만1000여 명분의 혈장(제품시가 30억원)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폐기처분했다. 이유는 이 혈장은 모두 적십자사가 분획 이후 자체 핵산증폭검사를 거쳐 제약사에 제공한 것이었지만, 제약사의 자체 검사결과 그 안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즉 적십자사가 출고 이전 벌인 핵산증폭검사에서 음성으로 나왔다고 해서 혈액제제 완제품에 이상이 없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복지부는 도대체 뭐 하고 있나
또 다른 의문점은 적십자사의 추적조사 시점이 왜 하필이면 2000년 4월부터 시작하는가 하는 부분. 적십자사는 “혈액관리법상 ‘헌혈유보군’의 개념이 만들어진 시점이 그때부터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적십자의 한 내부 관계자는 “2000년 이전에도 ‘헌혈유보군’의 개념은 적십자 내부지침에 ‘수혈부적격자’라는 개념으로 존재했다”며 “2000년 이전 수혈 부적격 혈액의 유출이 워낙 많다 보니 그 후부터 추적조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1999년 12월 당시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간염 발생률을 보면 전체 혈우병 환자 1329명 중 48.9%인 650명이 C형 간염에, 3.7%인 49명이 B형 간염에 감염됐고, 에이즈 환자도 무려 21명에 달했다. 전체 환자 중 간염에 감염된 환자만 절반이 넘는다. 혈우병환우회 김성근 사무국장은 “혈우병 치료제가 없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혈우병 환자의 절반 이상이 B형, C형 간염에 감염된 상황에서 적십자사가 혈우병 환자를 추적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에이즈에 이어 간염의 수혈 감염도 법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적십자사 발표의 신뢰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요소는 추적조사에 소요된 시간이다. 적십자사의 보도자료에는 추적조사에 소요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적십자사가 당초 추적조사 계획을 발표한 시점은 국정감사가 벌어졌던 지난해 10월이었다. 하지만 서류 분석을 마치고 각 혈액원이 2550명의 수혈자와 800여명의 헌혈자에 대한 실제 추적조사에 들어간 시점은 올 1월이었다. 17개 혈액원이 모두 동원됐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매일 60명의 사람과 병원, 질병을 추적했다는 결론이다. 국립보건원이 역학조사를 실시했다면 몇 년이 걸릴 분량을 적십자사는 단 50여일 만에 해치운 셈. 또 추적조사 중 분명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거나 주소지 이동 등에 의해 추적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내용도 전혀 없다. 보건복지부 공공보건관리과의 한 관계자는 “행정자치부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사라진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데 단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적십자사에 대한 감사 및 관리 권한을 가진 복지부의 혈액 담당 직원의 답변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혈액을 전담하는 부서가 생긴 지 얼마 안 되고 전문성이 없어 적십자사가 보고하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는 수혈에 의한 C형 간염 감염사고 때문에 제약사가 문을 닫고 보건성 장관이 사퇴했으며, 영국에서는 에이즈와 C형 간염 감염 사례 수천여 건을 정부가 직접 밝혀내 1000억원을 들여 배상에 나섰다. 과연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