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2월14일 박정규 신임 대통령 민정수석(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박수석은 노대통령과 허물없는 사이다.
지난해 11월 무렵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 관계자들 사이에서 은밀히 나돌던 ‘소문’이다. “‘송광수 검찰총장이 최근 서울 강남 룸살롱에 자주 드나든다’는 내용의 국정원 보고서를 본 문수석이 ‘송총장은 술도 한두 잔밖에 마시지 못하는데 이런 엉터리 보고서가 어디 있느냐.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을 색출해 당장 문책하라’고 국정원측에 지시했고, 이에 따라 검찰을 담당하는 국정원 관계자가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당시 문수석은 민정수석실 직원을 통해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당시 국정원 고위관계자도 “송총장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런 보고를 올릴 리가 있겠느냐. 나도 그런 소문이 나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과 동향인데다 고시공부 함께 해
이 소문은 그야말로 소문에 불과하다고 해도 민정수석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인지를 시사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민정수석은 공직기강, 사정, 대통령 친인척 관리 등의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약점 등 시시콜콜한 정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정보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민정수석의 교체는 보통 권력 관계의 재편으로 받아들여진다.
박정규 신임 민정수석은 노무현 대통령 측근 그룹에서는 언젠가는 중용될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노대통령과 동향인 경남 김해 출신인데다 부산의 한 암자에서 노대통령, 정상문 대통령총무비서관과 함께 고시공부를 한 인연이 있는 등 노대통령과는 허물없는 사이이기 때문. 그는 노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지만 노대통령과 친구처럼 지내왔다. 박수석은 그동안 청와대에 자주 들어가 노대통령에게 쓴소리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수석이 임명되자 이석태 공직기강비서관과 특수부 검사 출신의 윤대진 특별사정반장도 2월15일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앞서 양인석 사정비서관도 2월 초 사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았다. 전임 문재인 수석과 손발을 맞췄던 비서관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박수석이 누구를 사정비서관 등으로 임명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무엇보다 박수석 임명 이후 민정수석실에 쏠리는 관심은 박수석이 과거 정권의 민정수석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지에 관한 것이다. 과거 민정수석은 검찰이 청와대 하명사건이나 국민적 관심이 쏠린 대형사건을 수사하는 경우 대통령 뜻을 받들어 검찰과 사전에 조율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검찰은 법무부를 통해 중요사건 수사 결과에 대해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권력과 검찰의 고리를 끊겠다”고 공언했다. 적어도 현재까지 노대통령의 이런 공언은 지켜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 전 수석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검찰과 고리를 끊는 데 노력했다. 검찰 안팎에서 “검사 출신의 박수석이 부임함으로써 권력과 검찰 관계에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이는 것도 당연하다.
검찰 관계자들은 대체로 앞으로도 문 전 수석 때와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검찰 서열로 보면 박수석 동기들이 이제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박수석이 검찰 수사에 개입하고 싶어도 검찰 내에서 박수석의 말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중견 검사는 “현재는 청와대의 그 누구라도 검찰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말했다.
박수석이 법무법인 김&장 소속 변호사로 있으면서 변론을 맡았던 손길승 SK 회장(왼쪽)과 문병욱 썬앤문㈜ 회장. 문회장 변론을 맡은 배경과 관련해 뒷말을 낳았다.
박수석의 발탁에 대해 노대통령 주변에서는 대체로 “노대통령 주변 사정에도 밝은데다 노대통령에게 허물없이 직언할 스타일이어서 민정수석으로서의 역할을 잘할 것”이라는 반응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노대통령 주변과 잘 아는 것이 오히려 민정수석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한다. 평소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온정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얘기다.
법조계에서는 대통령 측근 비리 연루자들의 변호를 맡아온 박수석의 발탁에 대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측근 비리 감시 역할을 해야 할 민정수석과 측근 비리 변호인은 이해 상충 문제가 생기기 때문. 그동안 법무법인 김&장 변호사로 일해온 박수석은 손길승 SK그룹 회장에게서 1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 비리 사건에서 손회장측 변호인으로 선임돼 변론을 맡아왔다.
박수석은 최 전 비서관이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 사석에서 “손회장은 처음부터 최 전 비서관에게 돈을 주기 위해 노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 이영로씨에게 11억원을 전달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최 전 비서관에게 흘러갔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 손회장 변호인으로서는 가능한 얘기겠지만 일반 국민의 정서나 검찰 수사 결과와 동떨어진 사건 인식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박수석이 수임한 사건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건은 노대통령의 부산상고 동문 기업인인 썬앤문㈜ 문병욱 회장 비리. 문회장은 지난해 4월 농협 사기대출 혐의로 구속된 김성래 전 썬앤문 부회장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방제환 전 동두천시장에 대한 문회장의 뇌물제공 혐의를 털어놓음으로써 한 달여 후 구속됐다. 문회장은 처음 법무법인 율촌을 선임했으나 나중에 박수석을 추가 선임했다. 잘 알려진 대로 문회장은 노대통령에게 5000만원의 경선 자금 및 1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인물.
박수석은 문회장에 대한 검찰 내사 단계에서부터 문회장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당시로서는 노대통령과 박정규 변호사의 관계를 몰랐지만 그래도 박변호사가 정중하게 자주 찾아와 부담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박수석은 그러나 문회장이 구속되고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자 변호인을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2월1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문 전 수석은 “사퇴해도 총선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박수석이 몸담고 있던 법무법인 김&장에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유난히 대형 사건이 몰려들었다. 특히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된 이후 웬만한 그룹은 김&장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박수석은 노대통령과 사시 동기인 이종왕 변호사와 같은 김&장 소속으로 있으면서 찰떡 궁합을 과시했다.
박수석은 1980년 노대통령보다 5년 늦게 32세에 늦깎이로 사법시험 22회에 합격했다. 문 전 수석과 사시 동기로, 박수석은 문 전 수석과도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검찰에 투신한 박수석은 평검사 시절에는 지방을 전전하는 등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탓인지 동료 검사들과도 자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95년 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의 발탁으로 대검 공보관으로 임명되면서부터. 그는 이후 특유의 친화력으로 기자들 사이에 이름을 날렸다. 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친근한 ‘부산 형님’으로 통했다. 그가 술자리에서 머리에 이고 건네주는 폭탄주는 아직까지도 검찰 기자실에서 전설로 통한다.
박수석은 2000년 초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 형사3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변신했다. 변호사로서 그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민정수석 임명 소식이 전해진 후 서울중앙지검의 한 고위간부가 “그가 그렇게 술 마시자고 했을 때 같이 술이라도 마셔줄 걸…”이라고 기자들에게 농담할 정도였다. 인생 후반기에 각광받고 있는 박수석이 어떤 민정수석으로 기억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