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산업체 기술연구소 모습.
행정개혁시민연합은 12월13일 ‘기술자 관련 제도의 개선방안’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발제자들은 “기술사에 대한 경제적 대우가 비슷한 학력과 경력을 지닌 치과의사나 변호사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며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이공계 기피는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이유에 관한 통계자료도 공개됐다. 과학기술자들은 의사, 법조인 등에 비해 사회공헌도가 높은데도 경제적 대우나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정도는 이들에 훨씬 못 미치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경제 결정론에 기인한 이 같은 현실은 이공계 위기를 말할 때마다 거론되는 한 예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장기술자의 최고 자격증인 기술사마저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장서 떠나 변리사 시험에 몰려
현재 기술사가 처한 가장 큰 문제점은 전문영역이 보장되지 않고, 영역 침범에 대한 제재방법이 없어 독자적인 사무소를 개설해 영업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2만6000여명의 기술사 중에서 사무소를 차린 이가 수백명에 불과할 정도다.
그렇다면 사무소를 차리지 않고 현장에서 기술사 자격증을 유용하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기술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엔지니어링, 건설 분야 기술사는 이른바 학경력기술자제도(건설기술관리법 등에 의해 일정한 학력, 경력이 있으면 정규 자격자와 같이 대우해주는 제도) 때문에 추가 인건비 부담으로 오히려 직장에서 더 불리한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점 때문에 대다수 기술사들은 자신의 기술 발전과 후진 양성은 제쳐두고 또 다른 자격증인 변리사로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고임금이라는 명분으로 현장에서 밀린 40대 이상의 기술사들이 한창 일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변리사 시험에 몰려드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변리사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의 나이는 주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다. 이공계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응시하며, 실제 합격하는 사람들의 나이도 이 연령대다. 우수한 이공계 대학생들이 수입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변리사 시험에 몰리는 것을 탓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절박한 데 문제가 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지 오래다. 이는 어느새 교육문제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정부에서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은 하나같이 사탕발림에 그치고 있다. 병력특례, 장학금 확대, 우수 과학교사 배치, 과학기술인상 제정 등등.
문제는 이들 대책이 대부분 대학의 연구자를 중심으로 고려한 아이디어 수준일 뿐 현장기술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줄곧 현장기술의 최고 자격증인 기술사가 변리사, 변호사, 의사 등에 버금가는 사회적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길이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같은 맥락에서 다음 세 가지 사항이 그동안 기술사들에 의해 제안돼왔다.
첫째, 대학 인력과 산업현장 인력 간의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 대학과 산업계의 일방통행은 국내 산업발전의 심각한 장애로 인식되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학위를 인정해주는 반면 대학에서는 기술자들의 현장 경험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쌍방향 인력 교류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절실한 형편이다.
둘째, 학경력인정기술자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자격증만으로 기술자의 능력을 평가할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력을 철저히 검증할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쉬운 방법으로 기술사를 인정하는 것은 기술자들에게 자기 계발의 동기를 감퇴시키고 기술사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이다. 다른 분야가 그렇듯 기술분야 역시 자격시험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기술 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다른 분야에서 건축법, 건설기술관리법,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 전력기술관리법 등 기술 관련 법령에 규정된 학경력인정기술자 제도를 즉시 폐지해 현장기술자들의 일에 대한 의욕과 성취욕을 돋우어야 한다.
셋째, 기술사법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 기술사법은 기술분야 최고의 전문가로서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업역 설정과 벌칙조항이 강화된 살아 있는 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기술자제도 문제는 너무도 복잡하게 엉켜 있어 일일이 지적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일, 즉 전문분야의 업무는 그 분야의 사람에게 맡기는 게 옳다.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를 구원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기술문제는 기술전문가에게’라는 큰 원칙 하에 관련 제도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돼야 대한민국의 먹고 살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