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1960년대 북파공작원들의 훈련 모습(왼쪽). 1970년대 해상침투 훈련을 받는 북파공작원(가운데 위). 70년대 ‘인간병기’가 되기 위한 특공무술훈련을 받는 북파공작원(가운데 아래).70년대 북파공작원의 완전무장한 모습.
‘실미도’에 등장하는 북파공작원들은 공군 소속이었다. 하늘에서 싸우는 공군이 왜 북파공작대를 운영했을까.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1971년, 한국군은 육·해·공군별로 첩보부대를 운영했다. 육군 첩보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라는 영어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이 3개 부대 중 공군의 OSI가 가장 강력한 부대로 꼽혔다.
OSI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5월 미 공군 첩보부대 요원인 매크라스에 의해 서울 오류동에서 창설되었다. 매크라스가 양성한 OSI 대원들은 미 공군 수송기를 타고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 낙하산으로 뛰어내린 후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육군의 HID는 전선을 통해, 해군의 UDU는 해상을 통해 침투하므로 ‘종심(縱深) 깊숙한’ 타격이 어려웠다. 그러나 공군의 OSI는 수송기를 타고 적 후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살포’되었기 때문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귀환 과정 역시 공군의 OSI가 가장 어려웠으므로 OSI는 가장 강력한 첩보부대로 육성되었던 것이다.
실미도 대원들은 공군 OSI 소속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북한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한 데 대한 보복으로 북한의 주석궁을 습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북파공작 부대인 공군의 OSI에 이 임무를 맡겼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육군의 HID(1951년 3월 창설)는 규모 면에서 가장 컸고, 해군의 UDU는 6·25전쟁 전인 1949년 6월 창설돼 가장 오래된 북파공작대란 기록을 갖고 있다.
2002년의 도심 시위를 주도한 것은 가장 수가 많은 HID와 소수지만 단결력이 강한 UDU 출신이다. 흥미로운 것은 OSI 출신은 이 시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파공작원 사정에 밝은 사람들조차 왜 OSI 출신이 신원(伸寃)운동에 나서지 않는가에 대해 궁금해할 정도로 OSI 출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봉은사’에 모셔진 북파공작원 위폐(위)와 희생된 북파공작원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정보사에 건립한 충혼탑.
논산을 비롯한 훈련소에서는 조교 한 명이 40∼50명으로 편성된 1개 소대를 교육시킨다. 특전사를 비롯한 특수부대에서는 한 명의 조교가 10여명(팀장 부팀장 제외)의 요원을 교육시킨다. 반면 북파공작대에서는 조교 한 명에 요원 한 명의 일대일 교육이 이뤄졌다. 따라서 북파공작대는 그 어느 부대보다도 날렵하고 대담했다.
팀장이나 부팀장, 조교는 훈련만 시킬 뿐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북한으로 침투하는 것은 ‘인간병기’가 된 요원들인데, 이들은 같은 동료 중에서 선발된 조장의 지휘를 받으며 북한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사형수나 무기수 출신들이 OSI 요원으로 선발된 것으로 그려 많은 사람들이 북파공작대 요원들은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믿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전과자들로 구성된 북파공작대는 북한 침투 즉시 내분이 일어나 자멸하거나 북한으로 귀순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다 누군가가 딴마음을 먹고 총부리를 돌리면 모든 요원이 몰살당할 수 있으므로 사회에 불만이 있는 전과자는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북파공작원들은 크게 군과 민간인 출신으로 구분된다. 군 출신은 사병 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특수요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한 경우다. 민간인 출신은 특전사나 해병대 등 특수부대에 지원할 생각으로 병무청 등을 방문했다가 특수요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한 경우다. 이곳에는 북파공작대에서 나온 물색조 사무실이 있었다. 물색조 요원은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에 대한 철저한 신원조회 과정을 통해 전과자들은 탈락시킨 후 신체검사 등을 거쳐 요원을 선발했다.
‘북파공작원은 전과자’ 사실과 달라
이렇게 선발된 요원들은 ‘○년간의 복무기간이 끝나면 ○만원의 돈을 지급한다. 임무 수행 중 다치거나 사망하면 보훈대상자로 지정돼 본인이나 가족에게 각종 보훈연금을 지급한다. 특수임무(북파)를 수행하면 그에 따른 수당을 지급한다’는 등의 약속을 받았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스스로를 군대 체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여러 번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1967년 전사한 마모씨는 육군 HID 생활을 한 후 다시 공군 OSI에 들어가 활동하다 전사했다.
군인과 민간인이 한 부대에 섞여 있다 보니 ‘이상한’ 문제가 생겼다. 군 출신 북파공작 대원이 임무나 훈련 중 죽거나 부상당하면 군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보훈 대상자로 지정돼 각종 지원을 받았고, 북파공작대 근무를 끝내면 병역을 필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민간인 신분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런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민간인 출신 대원들은 북파공작대에 들어오는 순간 가족과의 연락이 두절돼 입대영장이 나왔을 때도 이를 알 수 없어 병역기피자가 되거나, 북파공작대 임무를 끝낸 후 다시 군대에 입대하는 처지로 몰리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공작대에 들어간 사람은 예비군훈련 기피자가 돼 해외여행에 제약을 받기 일쑤였다. 약속한 보훈대상자도 되지 못했다는 불만 때문에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공작원이 된 사람들의 분노는 군인 출신에 비해 훨씬 더 높은 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군과 민간인 출신을 막론하고 애초 약속받은 돈을 받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북파공작대 출신인 H씨의 말이다.
“적군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임무와 혹독한 훈련을 받다보면 반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해진다. 따라서 복무기한이 끝나면 ‘살아 있다’는 것에 감격해 대부분 미련 없이 북파공작대를 떠나게 된다. 부대에서 ‘며칠까지 통장으로 돈을 보내주겠다’는 말만 듣고 생존의 환희에 젖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한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졌지만 불과 5∼6년 전만 해도 자기 주장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던 세상이 아닌가. 근무했던 부대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기 싫은데, 누가 다시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내가 목숨을 던져 충성한 국가가 내게 돌려준 것은 배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스통을 들고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현재 육·해·공군의 북파공작대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국군정보사(이하 정보사)다. 흥미로운 것은 정보사가 “북파공작원들에게 약속한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보사 쪽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년 이후부터 북파공작원들에게 8000여만원의 돈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나 ○○년 이후는 남북 관계가 좋아 다수의 북파공작원을 보낼 필요가 없는 때였다. 문제는 가장 엄혹한 시절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침투한 요원들이 보상은커녕 약속받은 돈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이 모임을 조직해 권리를 주장하자, 정보사는 2000년부터 1인당 3000만∼6500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금액은 이들이 약속받은 돈을 지금의 물가로 환산한 것은 물론이고 북파를 거의 하지 않은 최근의 북파공작원들이 받은 것보다 적었다. 때문에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또다시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다.
정부를 불신하게 된 북파공작원 단체들은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특수임무유공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 제정이었다. 현재 국회 국방위를 통과하고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이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효력을 발휘한다. 이 경우 정부는 최고 2억4000만원(북파돼 임무 수행 중 전사자)까지의 보상금을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나 그 유족에게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는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의 마음은 어떨까. 한 관계자는 “우리가 정부로부터 꼭 보상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고, 또 남파된 북한공작원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보면서부터였다. 국가의 명령을 받고 안보 임무를 수행한 사람에게는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남파된 북한공작원을 양심수라고 하여 북한에 돌려보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 권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수임무유공자 보상법이 제정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정보사는 물론이고 상급기관인 국방부와 기획예산처(이하 예산처)가 바빠졌다. 6·25 전쟁 이후 육성한 북파공작원 수가 1만여명을 넘고 전사나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사람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다 보니 이들에 대한 보상금 재원 마련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와 정보사는 예산처에 별도 예산을 마련해달라고 하고, 예산처는 국방부와 정보사 예산으로 해결하라며 서로 미루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군 관계 인사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미국이나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서도 우리의 북파공작대와 같은 특수부대를 운영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는 ‘삥땅’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깨끗이, 그리고 공정하게 해결하기 때문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북파공작원에게 가야 할 돈을 ‘삥땅’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도 이것을 추적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경위를 밝히고 죄질이 나쁜 사람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북파공작원들에 대한 보상도 이뤄져야 한다. 정보사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으로부터 외주를 받아 북파 임무를 수행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 해결에는 예비비 형태로 많은 정보비를 운영할 수 있는 국정원도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반성한다는 점에서 국정원과 국방부, 예산처 등은 북파공작원 보상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