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구 안 되는 조용한 마을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정자 아래 섬진강변으로 초등학생들이 가을소풍을 온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소풍의 기억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하나 둘, 하나 둘’ 호루라기 소리에 발맞춰 나도 그 아이들 틈에 끼어들고 싶다.
내가 사는 지리산 섬진강변의 아주 작은 마을 마고실은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시내버스가 하루에 겨우 세 번 들어오는 마을인데, 달랑 여섯 가구에 주민이라야 칠순이 넘은 동네 노인 일곱 분과 유일한 ‘영계’인 우리 내외, 그리고 강아지 ‘나무’까지 겨우 ‘열 명’이다. 이런 마을에 초등학교 3, 4학년생 70여명이 소풍을 왔으니 마을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아이들의 함성소리에 일손을 놓은 할머니들이 마고정으로 모여들었다. 강변을 뛰어다니는 ‘손자 손녀’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들이라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을까. 모두들 소녀처럼 웃으면서도 눈가에 촉촉한 그 무엇이 비쳤다.
아름다운 이 세상 당신은 ‘보물’을 찾았나요
뒷집 할머니는 지난봄에 할아버지를 먼 곳으로 보냈다. 함께 이 마을에서만 꼭 60년을 살아 금강혼식을 치렀으니 언뜻 생각하기에 여한이 없을 듯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구마 밭 옆에 할아버지를 묻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밭일하러 나가도 먼저 할아버지 무덤에 들러서 안부를 묻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그 무덤 옆에 앉아 하염없이 섬진강을 내려다보곤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어느덧 가을인데도 한결같은 것이다.
아직 젊은 내가 뒷집 할머니의 그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함께 육십 년을 살다봉께, 한 몸이여. 영감이 먼저 갔다능 게 안적 믿기지 않는당께. 종친회 같은 디서 영감 앞으로 핀지가 옹께, 절대루 죽은 게 아니랑께.” 그렇다. 그런 것이다. 요즘 세상이야 이별도 쉽고 만남도 쉽다 보니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할머니는 일평생 꼭 한 번 만나고 꼭 한 번 이별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고구마를 캐도 영감과 함께 캐고, 감이 익어도 영감과 함께 감이 익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소풍 온 아이들이 김밥을 먹고, 마침내 보물을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 돌을 들추어보고 풀밭을 살피며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하나라도 보물을 찾은 아이들이야 펄쩍펄쩍 뛰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새침해져서 금세 울 것만 같다. 할머니들은 환하게 웃으면서도 “아이구,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혀를 찬다. 왜 보물찾기는 공평하지 않은가. 왜 언제나 못 찾는 아이들이 더 많아야 하는가. 내 어린 시절의 보물찾기도 끝내 허탕이었다. 금세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서운하고 또 서운했던가.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보물찾기는 어린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시인이 되었으니 시가 나의 보물인지 모르겠으나, 그 보물 또한 인생을 걸어도 찾기가 만만치 않다. 팔순이 넘은 뒷집 할머니는 일생의 보물인 할아버지와 더불어 육십 년을 살고도 저리 한스러워하는데 그에 비하면 나의 보물은 찾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갈고 닦아도 여태 빛나지 않는 돌덩이인 것이다.
뒷집 할머니가 천상병 선생의 시 ‘귀천’을 어찌 알까마는, 시야 모른다 할지라도 할머니는 이미 시처럼 살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무덤가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소풍 왔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마고실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굴뚝마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느라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를 따라 오르는 것이 어찌 덧없는 인생뿐이랴, 말 못할 그리움뿐이랴. 그러나 우리들의 즐거운 소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뒷집 할머니의 그것보다 더 쓸쓸한 가을 저녁이 어디에 있으랴.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잊고,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지 못할 뿐이다.
* 이원규 시인은 1998년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옛 애인의 집’ 등 4권의 시집을 냈다. 현재는 지리산 이곳저곳에서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지리산 섬진강변의 아주 작은 마을 마고실은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시내버스가 하루에 겨우 세 번 들어오는 마을인데, 달랑 여섯 가구에 주민이라야 칠순이 넘은 동네 노인 일곱 분과 유일한 ‘영계’인 우리 내외, 그리고 강아지 ‘나무’까지 겨우 ‘열 명’이다. 이런 마을에 초등학교 3, 4학년생 70여명이 소풍을 왔으니 마을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아이들의 함성소리에 일손을 놓은 할머니들이 마고정으로 모여들었다. 강변을 뛰어다니는 ‘손자 손녀’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들이라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을까. 모두들 소녀처럼 웃으면서도 눈가에 촉촉한 그 무엇이 비쳤다.
아름다운 이 세상 당신은 ‘보물’을 찾았나요
뒷집 할머니는 지난봄에 할아버지를 먼 곳으로 보냈다. 함께 이 마을에서만 꼭 60년을 살아 금강혼식을 치렀으니 언뜻 생각하기에 여한이 없을 듯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구마 밭 옆에 할아버지를 묻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밭일하러 나가도 먼저 할아버지 무덤에 들러서 안부를 묻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그 무덤 옆에 앉아 하염없이 섬진강을 내려다보곤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어느덧 가을인데도 한결같은 것이다.
아직 젊은 내가 뒷집 할머니의 그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함께 육십 년을 살다봉께, 한 몸이여. 영감이 먼저 갔다능 게 안적 믿기지 않는당께. 종친회 같은 디서 영감 앞으로 핀지가 옹께, 절대루 죽은 게 아니랑께.” 그렇다. 그런 것이다. 요즘 세상이야 이별도 쉽고 만남도 쉽다 보니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할머니는 일평생 꼭 한 번 만나고 꼭 한 번 이별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고구마를 캐도 영감과 함께 캐고, 감이 익어도 영감과 함께 감이 익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소풍 온 아이들이 김밥을 먹고, 마침내 보물을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 돌을 들추어보고 풀밭을 살피며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하나라도 보물을 찾은 아이들이야 펄쩍펄쩍 뛰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새침해져서 금세 울 것만 같다. 할머니들은 환하게 웃으면서도 “아이구,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혀를 찬다. 왜 보물찾기는 공평하지 않은가. 왜 언제나 못 찾는 아이들이 더 많아야 하는가. 내 어린 시절의 보물찾기도 끝내 허탕이었다. 금세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서운하고 또 서운했던가.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보물찾기는 어린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시인이 되었으니 시가 나의 보물인지 모르겠으나, 그 보물 또한 인생을 걸어도 찾기가 만만치 않다. 팔순이 넘은 뒷집 할머니는 일생의 보물인 할아버지와 더불어 육십 년을 살고도 저리 한스러워하는데 그에 비하면 나의 보물은 찾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갈고 닦아도 여태 빛나지 않는 돌덩이인 것이다.
뒷집 할머니가 천상병 선생의 시 ‘귀천’을 어찌 알까마는, 시야 모른다 할지라도 할머니는 이미 시처럼 살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무덤가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소풍 왔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마고실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굴뚝마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느라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를 따라 오르는 것이 어찌 덧없는 인생뿐이랴, 말 못할 그리움뿐이랴. 그러나 우리들의 즐거운 소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뒷집 할머니의 그것보다 더 쓸쓸한 가을 저녁이 어디에 있으랴.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잊고,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지 못할 뿐이다.
* 이원규 시인은 1998년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옛 애인의 집’ 등 4권의 시집을 냈다. 현재는 지리산 이곳저곳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