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을 부르는 28세의 에디트 피아프.
파리시청에서는 ‘파리의 연인, 에디트 피아프’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내년 1월까지 열린다. 1920~30년대 파리의 풍경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피아프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전시다. 파리에서 태어나 자라고 파리를 노래함으로써 ‘낭만의 도시’ 파리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샹송의 여왕에게 시 차원에서 경의를 표하는 셈이다.
전시장 내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피아프의 노래들은 물론 각종 사진과 포스터, 기록영화와 편지 등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절로 멈추게 한다. 피아프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시장은 그녀의 향기로 가득하다.
이밖에도 프랑스 전역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소재로 한 전시회, 공연, 기념도서, 음반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피아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연극 ‘피아프, 가시옹의 딸’이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평전에서부터 화보집에 이르기까지 피아프의 삶과 사랑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신간들이 서점가를 장식하고 있다.
여러 기념음반들 중 백미는 7곡의 미발표곡을 포함한 피아프의 노래 413곡을 20장의 CD에 나누어 담은 음반이다. 이 정도면 가히 ‘에디트 피아프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하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각 장르의 가수들이 피아프의 주요곡에 각자의 색깔을 입혀 녹음한 옴니버스 앨범도 있다. 이와 함께 파리를 주제로 한 노래, 영어로 부른 노래,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부른 노래 등 피아프의 음악을 주제별로 묶은 음반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파리 시청서 내년 1월까지 전시회
풍성한 기념행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에디트 피아프’가 프랑스 대중음악, 더 나아가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그러나 피아프의 감미로운 노래 이면에는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녀의 삶이 감춰져 있다.
1915년 곡예사인 아버지와 무명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아프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 가출했고, 피아프는 아버지를 도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녀가 유년기를 보낸 파리 벨빌 지구는 당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18세 때 낳은유일한 딸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피아프의 연인 중 한 사람인 배우이자 가수 이브 몽탕, 영화관을 찾은 피아프와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 무명 시절의 이브 몽탕과 피아프(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피아프의 본명은 에디트 지오반나 가시옹이다. 피아프라는 예명은 프랑스어에서 ‘참새’를 일컫는 속된 표현이다. 무명 시절 그녀는 기성 가수 프레엘이 참새 창법을 구사하는 데에 깊은 감명을 받고 ‘피아프’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피아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세계챔피언 출신 복서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두 연인은 하루빨리 재회하길 원했고, 세르당은 배 대신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피아프는 연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심정을 담아 손수 작사한 노래가 바로 ‘사랑의 찬가’다.
이에 앞서 배우이자 가수인 이브 몽탕을 그가 무명이던 시절에 만나 연인이 되었다. 몽탕이 유명인이 된 데에는 피아프의 숨은 노력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사망하기 두 해 전인 1961년 26년 연하의 그리스 청년인 이발사 테오카니 랑부카스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거듭하던 중 피아프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결국 피아프는 1963년 3월 파리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후 수개월을 병상에서 지내다 그해 10월11일 48년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유언에 따라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아버지, 딸과 함께 묻혔다.
피아프를 둘러싼 다양한 일화들은 약간의 과장이 섞여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피아프는 길 모퉁이에서 태어났다는 일화와는 달리 병원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 실명의 위기를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넘겼다는 이야기는 잠시 각막염을 앓았던 일이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화들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그녀의 삶과 노래들은 ‘20세기의 전설’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음반 매년 15만장 팔려나가 인기 여전
피아프의 목소리는 화려한 동시에 힘이 있고, 힘이 있는 동시에 애절하다. 그녀가 무대에 설 때마다 147cm의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노래는 모든 관객을 압도했다. 피아프의 노래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평범한 멜로디의 곡들이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창법으로 가사에 실린 감동을 전달할 줄 알았다. 또한 일생을 사랑 속에서 살았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노래에는 언제나 사랑의 감정이 넘쳐났다. 실제로 피아프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노래 없는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어요. 사랑 없는 노래도 마찬가지지요. 노래와 사랑, 둘 다 있어야 해요.”
피아프의 감미로운 노래들은 그녀의 삶이 묻어나는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와 함께 샹송이라는 프랑스 대중음악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발표한 곡들은 이후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려졌고 아직도 프랑스 국민들의 애창곡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다.
대표곡 ‘사랑의 찬가’와 더불어 이브 몽탕과의 사랑을 노래한 ‘장밋빛 인생’, 곡에 맞는 가사를 찾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빠담 빠담’, 조르주 무스타키가 준 곡 ‘밀로르’ 등은 지구 건너편에 있는 우리 귀에도 익은 명곡들이다. 샹송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유럽을 대표하는 대중음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에 피아프의 공이 지대하다는 사실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피아프의 천재성이 꽃필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프랑스 국민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열정이다. 피아프의 기념일을 맞을 때마다 반복되는 일련의 기념행사들은 자칫 ‘상업적인 연례행사’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시청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피아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식지 않는 애정과 그리움이다. 피아프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녀의 음반은 매년 15만장 이상 팔려나간다.
피아프와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진 시인 장 콕토는 공교롭게도 그녀가 타계한 날에 내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로 피아프를 예찬했다고 한다. ‘피아프 이전에도 피아프는 없었고, 피아프 이후에도 피아프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