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들이 쉬쉬해왔을 뿐 크고 작은 버그를 가진 채 출시된 휴대전화가 적지 않다.
카드회사에서 일하는 양모씨(29)는 최근 휴대전화 때문에 낭패를 봤다. 외근 중에 중요한 전화를 받기로 했었는데 느닷없이 전화기가 ‘먹통’이 된 것. 그는 “떨어뜨리거나 어디에 부딪힌 적도 없는데 액정화면이 사라지고 전화가 불통이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회사원 최모씨(30)는 무선인터넷에서 벨 소리를 다운받을 때마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사라지고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그는 “배터리를 떼었다 다시 끼우면 정상으로 돌아오지만 툭하면 액정화면이 사라지고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휴대전화 버그 혹은 결함은 양씨의 휴대전화처럼 액정화면이 사라지거나 일시적으로 송수신이 안 되는 경우다. 이밖에도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뒤집히거나 갈라지는 경우, 장시간 통화시 전화기에서 열이 발생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경우, 지정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는 경우, 특정 전화번호의 송수신이 안 되는 경우 등이 있다. 최근엔 최씨의 휴대전화처럼 동영상이나 정보를 다운받는 과정에서 오류가 나타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인도 수출 물량 리콜 국제적 망신
새로 출시된 휴대전화를 바로 구입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구입하는 게 버그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자영업자 김모씨는 얼마 전 60여만원을 들여 삼성전자의 SCH-V330 휴대전화를 구입했다. 그는 구입한 대리점에서 다섯 번이나 휴대전화를 교환했다고 한다. 통화 중에 ‘먹통’이 되는 버그가 거푸 나타났기 때문. 휴대전화 판매원은 “통신회사의 기지국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댔지만, 김씨는 휴대전화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믿고 있다. 오류에 대한 보상금조로 배터리 하나를 받고 다섯 번째로 바꾼 전화기를 쓰고 있는 그는 “대리점에서 배터리 1개를 공짜로 준 것으로 봐서 여러 사람이 비슷한 피해를 당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기능 향상 업그레이드는 고장 수리
김씨의 추측은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SCH-V330에 대해 ‘기능을 높여주는’ 업그레이드 행사를 연 적이 있는데, 말이 업그레이드지 실상은 버그를 ‘은밀히’ 고쳐준 것이다. 일부 SCH-V330 사용자들은 통신회사로부터 ‘휴대전화 업그레이드 행사를 한다’는 문자메일(SMS)을 받았다. 업그레이드 행사에 참여하면 삼성전자 부담으로 배터리 1개를 무료로 준다는 ‘당근’까지 제시한 터라 업그레이드를 받은 사용자들이 많았지만 번거롭다는 이유로 그냥 사용하는 구입자들도 적지 않다. 버그가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은 탓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혹은 자신의 전화기만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소비자들이 많은 것이다.
LG전자의 스테레오폰(왼쪽) 등 첨단 기능이 가미된 휴대전화가 경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음악과 동영상에서 각각 첨단 기능을 자랑하며 출시된 IM-6100(가운데)과 SCH-V330은 버그를 안고 태어났다.
그나마 배터리 1개를 위로금조로 받은 SCH-V330 구매자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SK텔레텍(스카이) IM-6100은 처음 출시된 제품의 상당수가 휴대전화 전원이 자동으로 꺼졌다 켜지는 등의 버그를 갖고 있었다. 회사측은 수정 패치를 대리점에 뿌려 버그를 잡을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소비자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 스카이 이용자는 “기능을 향상시켜주는 업그레이드인 줄 알고 갔는데 막상 얘기를 들어보니 사실상의 리콜이었다”면서 “대리점이 집에서 먼 탓에 차비가 만만찮게 들었는데 보상은커녕 미안하다는 인사치레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IM-6100 사용자들 역시 업그레이드를 받으라는 SMS를 받았지만 전화기에 오류가 있다는 설명은 없었다. 업그레이드를 받지 않은 소비자들은 전화기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SCH-V330, IM-6100 외에도 다수의 소비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모델은 업체별로 한두 개가 아니다. 벨 소리를 최대로 해놓아도 들릴 듯 말 듯 해 전화가 온 줄 모르고 있기 십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삼성전자의 XXXX, 휴대전화가 자동으로 재부팅된다고 호소하는 소비자가 많은 LG전자의 YYYY, 수화음이 작아 통화하는 데 큰 불편이 따른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SK텔레텍의 ZZZZ 등등. 특히 출시된 지 2년 이상 된 초기 폴더형 제품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SK텔레텍 관계자에 따르면 각 제조업체 공히 플립형에서 폴더형으로 넘어가는 초기단계에 출시된 제품들은 액정에 결함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제품에 대해서는 보상은커녕 무상수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액정화면에 대한 문제점이 가장 많이 제기되는 제품은 LG전자의 I-book과 I-book과 외관이 비슷한 Cyber5000. 이들 제품은 액정화면이 꺼지거나 뒤집히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오류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버그 의심 제품이다. I-book은 상당수의 소비자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또 다른 문제점도 갖고 있다. 충전시 충전기와 휴대전화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매일 20~30분씩 휴대전화를 들고 씨름을 한다”며 충전시 어려움 때문에 다시는 LG전자 제품을 구입하지 않겠다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
삼성전자 구미공장 휴대전화 라인.
“첫 휴대전화는 배터리와 본체를 잇는 연결 부분이 부러졌습니다. 제 잘못인 줄 알고 고무줄로 본체와 배터리를 묶어서 사용하다 미관상 좋지 않아 서비스센터를 찾았죠. 그런데 저하고 똑같은 문제로 찾아온 사람이 열 명이 넘더군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은 피해를 겪은 겁니까? 그 정도면 리콜을 해야죠.”
이씨가 두 번째로 구입한 휴대전화는 액정에 결함이 있는 Cyber5000. 이번에는 휴대전화 액정화면의 위아래가 뒤집히는 오류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다른 구입자들도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서비스센터로 달려갔지만 “취급 부주의로 생긴 문제이니 수리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는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휴대전화 버그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는 이유를 경쟁사보다 먼저 최신 제품을 출시하려는 업체간 속도 경쟁에서 찾는다. 휴대전화 하나의 라이프사이클은 5~6개월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초기 3개월 만에 전체 물량의 80%가 소화되고 있으며 휴대전화 하나를 개발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기획단계를 제외하면 대략 10개월 정도로 잡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기능을 장착한 휴대전화를 가장 먼저 출시하기 위해 서두르다 보니 아무래도 검증 작업이 소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또 휴대전화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제조업체 통신업체 콘텐츠업체의 상호호환 문제 등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버그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동영상 무선인터넷 MP3 등 휴대전화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통신업체 쪽 책임인지 제조업체 쪽 책임인지를 밝히기 어려운 경우도 늘고 있어 모든 버그가 제조업체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면서 “각 모델별로 초기 제품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 처음 나온 모델은 바로 구입하지 말라고 소비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