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 끝난 오후 4시경, 이들은 잠시 짬을 내 ‘서울팀’과 얘기를 주고받은 뒤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역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최씨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일행과 떨어진 최씨는 서울시청 앞 P호텔에서 SK그룹 손길승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부산행 새마을호를 타지 않은 최씨가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음을 증명해주는 자리이자,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순간이었다. 검찰 수사기록에는 최씨가 이 자리에서 양도성 예금증서(CD) 11장(11억원)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대통령과 연결창구 찾던 이들의 구세주
이영로씨 소유의 백양농원 내 별장.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등 몇 차례 이곳에서 모임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아래는 백양농원 전경.
손길승 회장을 만난 직후인 지난해 연말, A그룹 K씨가 어렵게 최씨에게 전화를 했다. K씨의 전화를 받은 최씨는 “회의중이다”며 전화를 끊었다. 측근에게 “전화를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해가 바뀌어도 전화는 없었다.
대검에 출두한 손길승 SK그룹 회장.
부산진구 부전동 대림빌딩에 있었던 최씨의 선거사무실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폐쇄되지 않았다. 부산상고 동창들은 물론 평소 발걸음을 않던 인사들도 이 사무실을 찾아 ‘최도술’을 찾았다. 이때 최씨는 이미 노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통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한 관계자는 “구정을 전후해 서울에서 내려온 민주당 한 인사가 ‘꼭 권노갑 마포 사무실 같다’고 하더라”고 당시 분위기를 기억했다. 그러나 대선 당시 부산 민주당에서 활동한 한 386 인사는 최씨의 일탈이 전적으로 그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전했다.
“평소 최씨가 가까이 지낸 고만고만한 기업들이 있었지만 대선 때 큰 도움을 준 것 같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었으니 어떻게든 청와대와 핫라인을 만들어야겠는데 문재인 변호사를 찾겠나, 이호철씨를 찾겠나. 결국 부산에 있는 최씨가 타깃이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최씨는 만만하지 않나.”
최씨는 손길승 회장을 소개한 이영로씨와 ‘특별히’ 친했다. 부산 사채업계에서 ‘이회장’으로 통하는 이씨는 부산상고 45회 출신으로 노대통령의 정치여정에 여러 차례 얼굴을 드러낸다.
2002년 12월 25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아들 건호씨 결혼식 모습
이날 행사장에는 신상우 부산상고 동창회장(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노후보의 부인 권양숙 여사도 미리 와 있었다. 참석자들은 이날 잦아들어가는 ‘노풍(盧風)’을 재점화하자고 외쳤다. 이씨는 행사 중간 중간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조용하게 수행했다는 게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행사 도중 유시민 의원도 합류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유시민이 참 말을 잘 하더라”고 기억했다. 정치적 결단과 승부의 순간 순간에 이씨가 매번 함께한 점이 눈에 띈다. 이씨는 H, K의원 등 한나라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이씨의 부인 배모씨는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부인 김모씨와 경남여고 선후배 사이로 평소 가까운 관계로 알려졌다.
최도술씨는 누구보다 이씨에게 깍듯했다고 한다. 최씨를 옆에서 지켜본 한 386 관계자는 “지구당 회계책임자라는 자리가 그렇지 않나. 그런 한계를 벗어나게 해준 게 아마 이씨 같다. 회계책임자 최씨가 어떻게 손길승 회장을 만날 수 있었겠나”고 이씨의 역할을 설명했다. 1월과 2월, 최씨는 이씨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활동하는 상공인을 만난 흔적이 포착되기도 했다.
2003년 2월,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최씨에게서 더 이상 과거 지구당 회계책임자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월, 노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L씨와 또 다른 L씨의 청와대 출입 문제가 총무팀의 고민거리였다. 당시 비서진들의 신원을 조회하느라 신분증 발급이 늦어졌을 정도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측근인 두 사람과 또 다른 인사 2, 3명에게 출입증이 발급됐다. 몇몇 비서진들이 ‘권한 남용’을 우려했지만 최씨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통령총무비서관 최씨는 ‘부산’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특히 최씨는 정윤재, 최인호, 노재철 지구당위원장 등 노대통령의 부산 386 측근들을 남몰래 챙겼다. 후원회 행사가 열리면 최씨는 항상 직접 참석, 봉투를 내놓았다. 문제는 그의 참석을 보는 부산 정치권과 상공인들의 시선. 그의 참석 소식이 알려지면서 덩달아 부산 상공인들도 젊은 노무현 사단의 후원회로 몰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최씨는 행사 후 지인들과 함께하는 저녁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씨의 잦은 부산행은 당시 사정기관의 주요 보고사항이었을 만큼 화제였다.
최씨의 활동반경은 4월이 되면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났다. 4월 초, 재경 부산상고 동창회 신호천 동창회장은 후배인 최씨에게 전화를 했다. 4월 중순에 있을 여의도 동창회 ‘원로들의 모임’과 관련, 최씨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오기는 어려울 것 같고 최동문이라도 와라. 와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선배들에 대한 도리 아니겠느냐. 지난 대선 때 모두 음지에서 고생했다.”
신회장의 말이 끝나자 최씨는 이렇게 답했다.
“양목회(동창회 산하 기별 모임) 모임에 갔다 왔는데 또 가야 합니까. 저녁 약속이 3개나 잡혀 있어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이후 동창회에서는 노대통령의 부산상고 ‘역차별론’이 터져 나왔다(상자기사 참조). 검찰소환을 앞둔 10월10일경 최씨는 우연히 만난 부산의 한 386 인사에게 “내가 (총대를) 멜 수밖에 더 있느냐”고 말했다. 이에 앞서10월5일 아침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부산시내 한 호텔에서 조찬을 함께한 자리에서는 “말 잘 듣고 열심히 하겠다”며 정계 입문에 대한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9월 중순 부산북·강서을 지역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던 최씨는 주민이 민원을 제기하자 즉석에서 청와대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북·강서을 출마를 노리는 통합신당 J씨는 “사람은 좋은데 공인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권력의 중심에 섰던 최씨는 차디찬 감옥으로 갔다.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여년. 하지만 수직 추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0여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