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0월1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작은 사진)의 SK 비자금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에게 재신임 여부를 묻겠다는 내용의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8월 초, 유성의 군 휴양지인 계룡 스파텔에서 휴가중(3~6일)이던 노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노대통령 부부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밤 늦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노대통령이 힘들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K씨는 특히 “노대통령이 정치권과 언론에 불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가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탄핵 등 ‘최악 상황’ 피하려는 고육책 시각도
“당신이 언론과 화해하라고 했지만, (양길승 몰카 사건과 관련 언론 보도 태도를) 한번 봐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이런 언론과 어떻게 화해하나….”
K씨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몇 차례 청와대를 방문, 노대통령에게 언론과 화해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물론 화합과 통합의 정치도 그가 노대통령에게 건의한 주요 사안이다. 노대통령은 당시 주변으로부터 이런 제의를 받고 “가능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K씨는 “양길승 사건을 전후해 노대통령이 다시 언론과의 전쟁에 나선 것 같다”고 분석했다.
K씨는 “휴가지에서 노대통령을 만났을 때 노대통령이 뭔가 큰 승부를 준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10월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문희상 비서실장(맨 오른쪽) 등 청와대 참모들이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소주 한 잔을 들이켠 K씨는 광안리 바닷가를 응시했다. 바다는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저 파도 같은 게 다가오고 있다. 잘못하면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어려워진다. 늦어도 내년 2월까지는 ‘수’를 내야 한다.”
“최악의 상황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스스럼없이 “탄핵 또는 그와 유사한 정치 상황”이라고 말했다. 독백처럼 말을 끝낸 K씨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수시로 노대통령 주변사람들을 만났다. 바깥에서보다 노대통령 주변에서 인식하는 정국에 대한 위기의식이 훨씬 수위가 높다는 것을 미뤄 짐작케 했다.
K씨가 말한 ‘위기’가 일찍 온 것일까. 10월10일, 노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재신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부를 얻거나, 아니면 모두를 잃는(all or nothing) ‘올인식’ 승부수였다. 벼랑 끝 전술에 대한 논란이 일지만 노대통령의 표정은 단호하다. 그는 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을까.
노대통령이 들고 나온 재신임 카드는 한마디로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국정혼란의 주된 원인을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설정했다.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과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등을 야당의 횡포, 일부 언론의 흔들기로 몰아붙였다. 이런 상황을 연출한 노대통령은 은연중 국민들에게 자신과 정치권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10일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를 마친 뒤 고건 국무총리(가운데) 등 국무위원들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 흘러다녔다. “발목만 잡는 이런 정치구도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특단의 조치설’은 양길승 몰카 사건으로 노무현 사단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7월과 8월, 강한 기류를 형성했다. K씨가 휴가지에서 만난 노대통령에게서 불편한 심기와 어려움을 인지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청와대와 예민한 채널을 형성한 정치권 인사들 중에는 노대통령이 외유를 떠나기 전 ‘뭔가를 결심할 것 같다’고 감지한 사람이 많다. 김원기 통합신당 주비위원장은 10월 초 최근 민주당을 탈당한 한 브레인으로부터 두툼한 보고서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보고서는 내년 총선과 관련한 신당의 전략을 담고 있는데 경제 및 한나라당의 분열, 민주당과의 관계설정 등을 정밀하게 분석해놓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신당의 ‘주도권 확보’ 방안을 밝힌 것으로, 노대통령이 제안한 재신임론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재신임 정국으로 들어서면서 취재기자들은 김위원장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는 이해찬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그는 노대통령이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 청와대를 찾아 청와대 내 386 참모 등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를 요청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기 직전인 10월9일 오전에는 “대통령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측근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문, 재신임 정국의 예언자로 비치기도 했다.
노대통령의 결단이 나오기 직전인 10월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이날 인도네시아 발리 그랜드 하얏트호텔. 노대통령과의 조찬 간담회를 주선하기 위해 취재진을 찾은 청와대 홍보수석실 관계자는 이색적인 요구를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방문 성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정상외교에 나선 노대통령의 입장을 좀 살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시큰둥했다. 방문 성과에 대한 노대통령의 설명이 끝나자 한 기자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고 했는데 우리도 ‘기자’ 해먹기 참 힘들다. ‘축구장’(해외)에서 ‘야구장’(국내) 얘기 해 미안한데, 야구 경기가 워낙 중요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 비리 의혹에 대한 질문이었다. 노대통령은 같은 리듬으로 답변했다.
“기자 하기 편하게 해주겠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지금 여기서 그런 얘기 많이 한다고 결판 나지도 않으니, 귀국해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심사가 뒤틀릴 만했지만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다. 노대통령은 귀국하는 기내에서 기자들 앞에 서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13일 국회연설에서 “당시 최도술씨 건을 보고받고 어떻게 국민을 보나 고민했다”고 말했다. 자존심 강한 노대통령이 측근인 최씨 사건을 결단을 앞당기는 동인으로 삼았음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다.
귀국한 다음날 노대통령은 ‘재신임 받겠다’고 선언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노대통령의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배경에는 총선과 관련,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10일 재신임 방법과 관련해 국민투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 정무수석은 “국민투표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물으려면 위헌 소지도 있어 정책을 함께 내걸어야 한다”며 “책임총리제를 전제로 중·대선거구제나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연계시키는 것도 공론에 부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국민투표 실시와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을 오래 전부터 검토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선거구에서 3∼5명 이상 뽑는 중·대선거구제는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실패한 지역구도 타파를 성공시킬 수 있는 제도다. 재신임 승부수를 통해 국민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이런 구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통치기반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 몰이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노대통령은 13일 국회연설에서 “순수하게 재신임만 묻겠다”고 말했지만 돈 안 쓰는 정치, 지역구도 타파에 대한 종전의 입장만큼은 분명히 했다. 재신임될 경우 이 문제는 최대 이슈로 부상할 전망이다. 문제는 야당의 반응.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국민투표를 통한 재신임을 주장하다가 ‘선(先)대통령 주변비리 규명, 후(後)재신임 절차’로 선회했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취했다가 뒤늦게 가시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이 국회연설을 통해 밝힌 ‘12월15일, 국민투표’ 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지만 명분을 선점당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재신임 선언 후 전주에서 열린 제84회 전국체육대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재신임 선언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싸워 승리하라. 그러나 이기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 유세를 방불케 한 즉흥연설은 ‘갬블러 노무현’의 캐릭터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노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이라크 파병 및 행정수도 이전, 토지공개념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과연 도박은 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