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사전’에서 다음 세기 인간의 모습은 유목민이라고 정의했다. 정보사회에서 현대인은 특정한 환경과 정보에 고정돼 있는 정착민이 아니라 쉴새없이 길과 정보를 찾아 헤매는 유목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군둘라 엥리슈는 직업을 따라 유랑하는 유목민이란 뜻으로 잡노마드(Jobnomad)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목의 의미가 단순히 노트북과 휴대전화, 헤드세트로 무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떠나는 삶에 국한되는 것일까.
유목이라는 낯선 용어가 어느새 현대인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지금, 이진경의 유쾌한 철학적 유목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이 탄생했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다. ‘천의 고원’ 12장에서 유목론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실 ‘천의 고원’은 보통 사람들에게 넘기 힘든 고지다. 장이 바뀔 때마다 지층화, 배치, 리좀,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 탈영토화, 추상기계 등 이질적인 개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한 두 천재들에게 용어 만들기는 즐거운 유희였겠지만, 일반 독자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기 딱 맞다. 게다가 정신분석, 철학, 문학, 언어학,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학문’을 총동원한 그들의 사유방식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진경씨는 1998 년 겨울부터 4년에 걸쳐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이 책을 강의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천의 고원’을 통해 내가 말했던 기록이고, 그 책과 더불어 내가 사유했던 기록이며, 그 책-기계를 이용해서 내가 알게 된 것, 만들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또한 그 책을 통해서 내가 그들의 사유와 섞이며 끄집어낸 것들의 모임이며 그들과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흔적들의 집합”이라고 했다. 겁 없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에 도전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 ‘노마디즘’은 고원을 넘는 데 도움을 주는 지도, 혹은 복잡한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매뉴얼처럼 반갑기 짝이 없다.
구어체로 진행되는 이진경의 강의록에 집중하다 보면 “음반을 걸어놓고 음악을 듣듯이 읽어달라”고 한 들뢰즈의 주문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진경의 강의는 쉽다. 들뢰즈가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꼽은 ‘배치’를 설명할 때 그는 축구공과 입을 예로 든다. 축구공은 축구공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경기 도중 우리 편 선수에게 날아가면 ‘패스’가 되고 잘못 차서 다른 편 선수에게 가면 ‘패스미스’, 골 그물을 흔들면 ‘골인’이 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 연결되는 것이 ‘계열화’이며, 공시적(共時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이 곧 ‘배치’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입은 식당이라는 배치 안에서 ‘먹는 기계’가 되고 강의실에서는 ‘말하는 기계’가, 침실에서는 ‘섹스 기계’가 된다. 또 배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항을 자기 안에 포섭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영토화’와 거기서 벗어나는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저자는 ‘천의 고원’에 난삽하게 등장하는 개념들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저변에 깔린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의 철학적 사유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천의 고원’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공저)와 ‘감시와 처벌’(푸코),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들뢰즈·가타리 공저)가 연결되는 통로를 찾았을 때 짜릿한 지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노마디즘’은 대가들의 뒤만 쫓는 주석서가 아니다. 이 책 ‘0장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12장 유목의 철학, 전쟁기계의 정치학’에는 8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탈근대적 사유로 확장시키려는 이진경 표 철학이 담겨 있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를 샅샅이 해부하되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은 독자적 사유를 보여준다. 책을 펼치면 “어렵더라도 처음 듣는 음악이 생소하고 귀에 선 것과 마찬가지려니, 생각하세요. 더구나 현대철학 아닙니까?” 이진경의 경쾌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노마디즘 전 2권/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 1권 788쪽, 2권 768쪽/ 각 권 2만8000원
유목이라는 낯선 용어가 어느새 현대인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지금, 이진경의 유쾌한 철학적 유목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이 탄생했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다. ‘천의 고원’ 12장에서 유목론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실 ‘천의 고원’은 보통 사람들에게 넘기 힘든 고지다. 장이 바뀔 때마다 지층화, 배치, 리좀,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 탈영토화, 추상기계 등 이질적인 개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한 두 천재들에게 용어 만들기는 즐거운 유희였겠지만, 일반 독자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기 딱 맞다. 게다가 정신분석, 철학, 문학, 언어학,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학문’을 총동원한 그들의 사유방식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진경씨는 1998 년 겨울부터 4년에 걸쳐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이 책을 강의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천의 고원’을 통해 내가 말했던 기록이고, 그 책과 더불어 내가 사유했던 기록이며, 그 책-기계를 이용해서 내가 알게 된 것, 만들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또한 그 책을 통해서 내가 그들의 사유와 섞이며 끄집어낸 것들의 모임이며 그들과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흔적들의 집합”이라고 했다. 겁 없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에 도전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 ‘노마디즘’은 고원을 넘는 데 도움을 주는 지도, 혹은 복잡한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매뉴얼처럼 반갑기 짝이 없다.
구어체로 진행되는 이진경의 강의록에 집중하다 보면 “음반을 걸어놓고 음악을 듣듯이 읽어달라”고 한 들뢰즈의 주문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진경의 강의는 쉽다. 들뢰즈가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꼽은 ‘배치’를 설명할 때 그는 축구공과 입을 예로 든다. 축구공은 축구공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경기 도중 우리 편 선수에게 날아가면 ‘패스’가 되고 잘못 차서 다른 편 선수에게 가면 ‘패스미스’, 골 그물을 흔들면 ‘골인’이 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 연결되는 것이 ‘계열화’이며, 공시적(共時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이 곧 ‘배치’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입은 식당이라는 배치 안에서 ‘먹는 기계’가 되고 강의실에서는 ‘말하는 기계’가, 침실에서는 ‘섹스 기계’가 된다. 또 배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항을 자기 안에 포섭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영토화’와 거기서 벗어나는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저자는 ‘천의 고원’에 난삽하게 등장하는 개념들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저변에 깔린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의 철학적 사유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천의 고원’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공저)와 ‘감시와 처벌’(푸코),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들뢰즈·가타리 공저)가 연결되는 통로를 찾았을 때 짜릿한 지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노마디즘’은 대가들의 뒤만 쫓는 주석서가 아니다. 이 책 ‘0장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12장 유목의 철학, 전쟁기계의 정치학’에는 8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탈근대적 사유로 확장시키려는 이진경 표 철학이 담겨 있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를 샅샅이 해부하되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은 독자적 사유를 보여준다. 책을 펼치면 “어렵더라도 처음 듣는 음악이 생소하고 귀에 선 것과 마찬가지려니, 생각하세요. 더구나 현대철학 아닙니까?” 이진경의 경쾌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노마디즘 전 2권/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 1권 788쪽, 2권 768쪽/ 각 권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