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은백양의 숲은 길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기형도 ‘대학시절’ 중에서
80년대의 대학은 시인의 기억처럼 어둡고도 무거웠다. 학생회관에 걸려 있던 걸개그림은 ‘데모가’가 울려 퍼지면 더욱 비장하게 펄럭였다.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던 친구는 ‘늘어선 전경의 방패를 보면 너무 무서워서 각목을 쥔 손이 와들와들 떨린다’고 털어놓았다. 그때의 장면들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려온다.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이 이제 하나의 역사가 되었듯, 당시 대학에 걸려 있던 걸개그림과 판화들도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한 부분을 당당하게 차지했다. ‘그림이 아닌 구호’라는 냉대를 받았던 민중미술은 지난 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展)’을 신호로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미술 사조들이 해외에서 유입된 데 비해 민중미술은 우리 사회에서 자생한 장르다. 민중미술은 걸개그림이나 몽타주 기법 등 다양한 표현방식을 개발하며 사회모순이나 정치, 역사, 환경 등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것만으로도 민중미술의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02 소장작품전’은 사실상 대규모의 민중미술 전시회다. 이 전시에는 민중미술의 대표주자인 오윤 임옥상을 비롯해 박불똥 홍성담 강요배 김인순 등의 민중미술, 현실주의 작품 150여 점이 등장했다. 물고문 장면을 형상화한 홍성담의 ‘욕조-어머니 고향에 푸른 바다가 보여요’, 실제 밥상 위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고무신과 흩어진 쌀알을 그린 이종구의 ‘밥’, 코카콜라 캔과 임산부의 배를 하나의 오브제로 뭉뚱그린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6’ 등 민중미술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직설적인 표현들은 시위현장이 아닌 미술관 안에서도 빛 바래지 않은 채 선명했다.
전시의 압권은 전시장 2층에 걸린 ‘80년대 그림판 이야기’다. 여러 작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14m 길이의 걸개그림에는 직격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을 비롯해 박종철 문익환 임수경 등의 얼굴이 등장한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의 김지영 큐레이터는 “80년대에 이런 전시를 했다면 당장 미술관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라고 농을 던졌다.
어떻게 서울시립미술관이 이처럼 많은 민중미술 계열의 작품들을 소장하게 되었을까? 이 전시는 가나아트의 이호재 대표가 200점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 작품의 판매나 전시 자체가 불가능했던 민중미술 작가들은 궁여지책으로 장터 형식의 전시를 열어 그림을 팔았다. 요즈음 500만원이 넘는 오윤의 판화들은 당시 좌판에서 몇 천원의 헐값에 팔려나갔다. 이호재 대표는 어려운 처지의 작가들을 후원하는 의미로 이 같은 작품들을 사 모았다. 시대가 바뀌자 그는 가격이 수십 배로 올라 현재 35억원을 호가하는 200점의 민중미술 작품을 기증했다.
서울시립미술관측은 이대표의 기증을 계기 삼아 리얼리즘, 현실주의 계열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수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미술관은 가나아트측의 기증작 외에도 150여 점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해외 작품의 경우, 미국이나 프랑스 쪽 작가들의 작품은 단가가 높아 수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중국 등 아시아와 제3세계권 작가들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은 나름의 개성을 소유하고 있는 동시에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죠.” 김지영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민중미술에 대해서는 ‘메시지는 뚜렷하나 표현방식은 조야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관 벽에 걸린 민중미술 작품들을 다시 보자 과거에는 격렬해 보였던 표현들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20여년이라는 시간의 힘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은 정치와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실존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전용석의 ‘거래’는 증권거래소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80년대의 운동권들이 사회에 진입했듯, 민중미술도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시립’ 미술관에서 대규모 민중미술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수집할 만큼 세상은 변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술관에서 민중미술 작품들을 보는 것은 분명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그림, 캔버스와 물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이자 고통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과거사에 대한 감상은 이제 기성 세대에서 그쳐야 하나보다. 전시장 안에는 방학숙제를 하러 온 듯, 여러 명의 중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전시 설명을 열심히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여중생 몇몇을 불러 세워 ‘작품에 대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경쾌한 대답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예뻐요!” (8월20일까지. 문의 02-2124-8800)
80년대의 대학은 시인의 기억처럼 어둡고도 무거웠다. 학생회관에 걸려 있던 걸개그림은 ‘데모가’가 울려 퍼지면 더욱 비장하게 펄럭였다.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던 친구는 ‘늘어선 전경의 방패를 보면 너무 무서워서 각목을 쥔 손이 와들와들 떨린다’고 털어놓았다. 그때의 장면들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려온다.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이 이제 하나의 역사가 되었듯, 당시 대학에 걸려 있던 걸개그림과 판화들도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한 부분을 당당하게 차지했다. ‘그림이 아닌 구호’라는 냉대를 받았던 민중미술은 지난 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展)’을 신호로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미술 사조들이 해외에서 유입된 데 비해 민중미술은 우리 사회에서 자생한 장르다. 민중미술은 걸개그림이나 몽타주 기법 등 다양한 표현방식을 개발하며 사회모순이나 정치, 역사, 환경 등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것만으로도 민중미술의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02 소장작품전’은 사실상 대규모의 민중미술 전시회다. 이 전시에는 민중미술의 대표주자인 오윤 임옥상을 비롯해 박불똥 홍성담 강요배 김인순 등의 민중미술, 현실주의 작품 150여 점이 등장했다. 물고문 장면을 형상화한 홍성담의 ‘욕조-어머니 고향에 푸른 바다가 보여요’, 실제 밥상 위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고무신과 흩어진 쌀알을 그린 이종구의 ‘밥’, 코카콜라 캔과 임산부의 배를 하나의 오브제로 뭉뚱그린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6’ 등 민중미술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직설적인 표현들은 시위현장이 아닌 미술관 안에서도 빛 바래지 않은 채 선명했다.
전시의 압권은 전시장 2층에 걸린 ‘80년대 그림판 이야기’다. 여러 작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14m 길이의 걸개그림에는 직격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을 비롯해 박종철 문익환 임수경 등의 얼굴이 등장한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의 김지영 큐레이터는 “80년대에 이런 전시를 했다면 당장 미술관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라고 농을 던졌다.
어떻게 서울시립미술관이 이처럼 많은 민중미술 계열의 작품들을 소장하게 되었을까? 이 전시는 가나아트의 이호재 대표가 200점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 작품의 판매나 전시 자체가 불가능했던 민중미술 작가들은 궁여지책으로 장터 형식의 전시를 열어 그림을 팔았다. 요즈음 500만원이 넘는 오윤의 판화들은 당시 좌판에서 몇 천원의 헐값에 팔려나갔다. 이호재 대표는 어려운 처지의 작가들을 후원하는 의미로 이 같은 작품들을 사 모았다. 시대가 바뀌자 그는 가격이 수십 배로 올라 현재 35억원을 호가하는 200점의 민중미술 작품을 기증했다.
서울시립미술관측은 이대표의 기증을 계기 삼아 리얼리즘, 현실주의 계열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수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미술관은 가나아트측의 기증작 외에도 150여 점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해외 작품의 경우, 미국이나 프랑스 쪽 작가들의 작품은 단가가 높아 수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중국 등 아시아와 제3세계권 작가들의 리얼리즘 계열 작품은 나름의 개성을 소유하고 있는 동시에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죠.” 김지영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민중미술에 대해서는 ‘메시지는 뚜렷하나 표현방식은 조야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관 벽에 걸린 민중미술 작품들을 다시 보자 과거에는 격렬해 보였던 표현들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20여년이라는 시간의 힘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은 정치와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실존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전용석의 ‘거래’는 증권거래소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80년대의 운동권들이 사회에 진입했듯, 민중미술도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시립’ 미술관에서 대규모 민중미술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수집할 만큼 세상은 변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술관에서 민중미술 작품들을 보는 것은 분명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그림, 캔버스와 물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이자 고통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과거사에 대한 감상은 이제 기성 세대에서 그쳐야 하나보다. 전시장 안에는 방학숙제를 하러 온 듯, 여러 명의 중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전시 설명을 열심히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여중생 몇몇을 불러 세워 ‘작품에 대한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경쾌한 대답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예뻐요!” (8월20일까지. 문의 02-2124-8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