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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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정말 끝난 거야?”

축제 끝난 공허감과 허탈감에 갖가지 증후군… 의욕상실증 등 정신과 찾는 이 늘어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10-18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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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정말 끝난 거야?”
    ”월드컵 정말 끝난 거야?” 지구의 종말까지 계속될 것 같던 월드컵이 진짜 끝나버렸다. 화려한 축제 뒤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허탈과 공허가 따르는 법. 결승 진출에 실패한 실망감은 오히려 뒷전이다. 이 땅에서 다시는 월드컵을 못 볼지 모른다는 우려와 도심의 8차선 대로를 질주하던 일탈의 기억은 현실의 옥죄임을 더욱 견딜 수 없게 한다.

    월드컵의 뒤꽁무니라도 잡아볼 요량으로 업무 팽개치고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은 정상적인 편에 속한다. 월드컵이 남긴 열기의 흔적을 좇아 밤새도록 TV 리모컨을 눌러대는 올빼미 습관이나 계속되는 밤 나들이로 수면부족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월드컵 기간의 강렬한 애국심은 강박증이 되고, 축구에만 집중되었던 신경세포는 제자리를 찾지 못해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일쑤.

    이런 정신적 공황 증세가 아니더라도 월드컵의 후유증은 깊고 크다. ‘열두 번째 대표선수’로 거리를 누볐던 시민들 중에는 뼈가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지는 등 월드컵 기간중 얻은 ‘영광의 상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월드컵이 만들어놓은 신드롬과 후유증을 사례별로 조명한다.

    올빼미족, TV 리모컨과의 동거

    오퍼상에서 일하는 이민수씨(32)는 월드컵이 끝난 후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월드컵 기간중 차에 태극기를 매달고 야간질주를 하던 습관이 지속되면서 밤만 되면 차를 끌고 강변도로를 질주하거나 도심 거리를 배회한다. 아니면 출근하자마자 밤 나들이 파트너를 물색해 술자리를 만든다. 항상 회식 장소는 광화문 근처. 월드컵 동안의 함성과 기쁨을 곱씹고 싶기 때문이다. 쇼핑도 밤에만 한다. 한번은 붉은색 와이셔츠를 사러 동대문 쇼핑몰을 밤새도록 헤집고 다닌 적도 있다.



    밤 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월드컵의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는 올빼미족은 또 있다. 월드컵 경기를 재방송하는 케이블TV 채널을 찾아 밤새도록 월드컵 항해를 하는 리모컨족이 그들. 한국팀의 경기, 슛 장면은 아무리 봐도 물리지 않는다. 심지어 월드컵 기간에 녹화해 둔 경기를 매일 반복해서 보는 사람도 있다.

    밤에는 썡쌩, 낮에는 꾸벅

    월드컵 올빼미족의 다음날은 거의 혼수상태다. 수면 패턴이 바뀌면서 밤잠이 사라지고 낮에 졸리기 시작하는 것. 사무실에는 꼭 몇 사람씩 후반전(오후)만 되면 연신 꾸벅대는 사람들이 보인다.

    인터넷 기업에 다니는 권석후씨(34)는 매일 밤마다 월드컵 경기를 분석하며 보내다 결국 일을 그르친 경우. 거래처 직원과 점심 약속을 한 그는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차 안에서 잠깐 졸다 깨보니 약속시간이 3시간이나 지났다. 상사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그날 저녁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한국 대 이탈리아전을 다시 보고 있었기 때문.

    시중에 나도는 우스갯소리처럼 ‘전반전(오전)에 헤매다 휴식시간(점심시간)에 밥 먹고 후반전(오후)엔 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연장전(야근)엔 아예 혼수상태. 하지만 집에 가면 또 멀쩡하게 리모컨을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월드컵 정말 끝난 거야?”
    붉은 악마로 맹활약을 펼쳤던 신주완씨(28)는 요즘 눈물이 날 지경이다.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됐던 월드컵 기사들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기 때문. 자신의 방을 온통 월드컵 관련 기사로 도배해 왔던 신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월드컵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의욕을 상실한 채 때로는 식사도 거부하고 월드컵 경기를 녹화한 테이프를 돌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습관까지 생겼다.

    정작 본인은 “월드컵이 끝나 조금 서운한 것 뿐”이라고 말하지만 말수가 줄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열광했다 울다 하는 그를 정상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요즘 그는 부모로부터 정신과 치료를 권유받고 있다.

    건망증 확산 …분실물 폭주

    서울시 강동구 H고등학교는 요즘 수업시간에 교사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월드컵 기간중 잦은 단축수업으로 수업시간의 변동이 심했던 탓에 교사가 수업시간을 착각하거나 잊어버려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생긴 것. 학생들은 교사가 들어오지 않아도 교사를 부르러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수업 마침 종이 울리고서야 비로소 ‘아차’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는 축구와 월드컵, 한국팀의 승리에 집중돼 있던 신경이 방향을 잃으며 무엇을 해도 흥이 나지 않는 의욕상실과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건망증으로 이어진 경우다. 실제 대 독일전에서 결승 진출이 좌절된 후 지하철 습득물 보관소에는 예전보다 10배에 가까운 물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아마 지금 주위를 돌아봐도 멍하니 딴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모두 월드컵이 차지하고 있던 공백이 가져다 준 신드롬이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를 ‘집단 최면’ 상태에서 풀려나는 일련의 과정이라 설명한다.

    응원의 부산물 ‘영광의 상처‘ 크다

    거의 광기에 가까웠던 거리응원과 군중의 게임 세레머니는 많은 환자를 만들어냈다. 월드컵은 끝났지만 광화문과 상암동 등 거리응원이 있었던 지역 주변 종합병원에는 응원 후유증 때문에 입원한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백화점 의류매장 여직원 지영원씨(24)는 이탈리아전이 있던 날 남자친구와 광화문의 군중 속에 섞여 있다 엄지발가락에 금이 가는 상처를 입었다. 설기현이 동점 슛을 성공시키는 순간, 발을 구르며 ‘팔짝’ 뛰던 앞사람의 육중한 몸이 그녀의 발을 짓누른 것. 두 달간의 치료를 ‘명’받은 그녀는 어렵게 잡은 직장을 잃을까 걱정이다.

    같은 날 경기가 끝난 후 냄비 두 개를 들고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세레머니를 벌이던 식당 여주인 김명자씨(48)는 트럭이 급출발하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져 왼쪽 팔꿈치 뼈가 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식당 주인이자 주방장인 그녀가 석고붕대를 하는 바람에 식당은 휴업중.

    세란병원 정형외과 궁윤배 과장은 “월드컵 기간중 한국전이 있는 날이면 하루에도 수십명의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이들처럼 뼈에 이상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경우도 서너 건 있었다”고 말한다. 그뿐이 아니다. 안정환 선수의 헤딩슛을 흉내내다 머리를 다친 아이, 헤딩슛을 흉내내다 눈가가 찢어졌는데도 황선홍 선수와 같은 자리를 다쳤다며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심지어 차에 타고 있다 응원단이 차를 흔드는 바람에 목뼈에 이상이 생긴 사람도 있었다. 광화문 인근 직장에 다니는 손현웅씨(36)가 바로 그런 경우. 대 스페인전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지프차를 몰고 세레머니에 참석한 손씨는 몰려든 군중이 차를 흔드는 바람에 목이 좌우로 심하게 꺾이면서 심각한 목뼈 부상을 입었다. 손씨의 차도 골병이 들긴 마찬가지. 누가 올라갔는지 차 지붕 상판이 심하게 우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엔도르핀의 무한한 공급원이었던 월드컵. 하지만 월드컵이 엔도르핀만 생산한 것은 아니다. 이번 월드컵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감정을 격하게 해 전투적 성향을 불러일으키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도 무한대로 분비시켰다. 그 결과 사소한 일에도 지나치게 과격해져 곳곳에서 싸움이 일어났고, 이런 전투적 성향은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미국전 당시 호프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TV 시청을 하다 채널 선택 문제 때문에 싸움을 해 경찰서 신세를 진 김응룡씨(23)는 벌금을 문 이후에도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에게 공격적이다. 김씨 자신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내 생각과 다르면 왠지 싸우고 싶어진다”며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페인전 후 경찰에 구속된 최모씨(29)의 경우는 한순간의 실수로 신세를 망친 경우. 경기가 끝난 후 애인과 함께 신촌에 갔던 그는 애인을 덥석 껴안는 생면부지의 응원단과 싸움을 벌여 전치 8주의 상처를 입혔다. 그에겐 월드컵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셈이다.

    이러한 갖가지 월드컵 후유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안정과 휴식, 자연스런 대화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일탈의 욕구가 끊이지 않고, 의욕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응원을 하며 고락을 함께 나눈 동료, 가족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그동안의 에피소드나 아쉬웠던 순간, 짜릿했던 골 장면 등을 회상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억눌린 욕구와 아쉬움은 자연스럽게 해소되고 현실 속으로 돌아온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정신과 전문의 정찬호)

    용인정신병원 신경정신과 하지현 과장은 이에 대해 “순식간에 과열된 감정은 그 원인이 사라지면서 극도의 공허감과 허탈감을 불러오기 때문에 잘 추스르지 않으면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술자리나 회합 등을 당분간 자제하고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면서 충분한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면 보충과 함께 등산이나 조깅, 산책 등 적절한 운동을 함으로써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능동적 방법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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