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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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착상·독특한 그림… 고정관념 ‘와르르’

  • 입력2004-10-18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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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한 착상·독특한 그림… 고정관념 ‘와르르’
    “진짜 1000원짜리입니다.”

    단숨에 여덟 권을 읽어버렸다. 가로 10.5cm, 세로 15cm, 24쪽 분량의 어른 손바닥만한 만화책. 여덟 권을 합쳐야 보통 책 한 권 두께다. 이 책을 펴낸 현실문화연구는 시리즈 제목도 생긴 대로 ‘벼룩만화총서’라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작고 가벼운 책이 남긴 여운은 길다.

    J.C. 므뉘의 ‘산란주의’는 대사가 없다. 아니 “퉤” 한마디가 전부다. 구부릴 줄 모르는 긴 다리를 가진 새의 알 낳기는 전쟁이다. 애써 낳아봤자 땅에 떨어져 깨지고, 풀숲에서 낳으니 뱀이 먹는다. 나무 밑에서 낳으니 열매가 떨어져 깨지고, 물속에서 낳으니 파도에 휩쓸려 가버린다. 어미새는 급기야 자신의 부리로 긴 다리를 자른다. 오리처럼 짧은 다리가 된 어미새는 마침내 안전하게 알을 낳고, 알 속에서 또다시 긴 다리 새가 태어난다. 난쟁이 같은 어미새를 본 긴 다리 새끼새의 첫 마디가 “퉤”이다. 만화는 여기서 끝난다. ‘산란주의’는 희생적인 모성이 어떻게 배신당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르동의 ‘죽음’에 등장하는 꼬마 양리는 시종 무표정하다. 양리가 다락방에서 반성문을 쓰는 사이 저택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처참하게 죽는다. 평소 목욕을 좋아하던 사촌누나 앙리에트는 욕조에 누운 채, 부부싸움이 잦던 삼촌과 숙모는 서로 끌어안은 채, 가정부는 오븐 속에 들어가 있고, 할머니는 우물 속에, 엄마는 2층에서 떨어진 채로 죽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꼬마 양리가 의자에 올라가 나무에 묶인 긴 밧줄을 잡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이 너무 흔한 이 저택에서 독자들은 양리도 당연히 죽음을 선택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양리는 밧줄에 고무튜브를 매달아 그네를 탄다. 그리고 비로소 웃는다. 양리의 미소는 어떤 재난과 재앙 속에서도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벼룩만화총서 1차분은 이 밖에도 땅끄렐의 ‘목매 죽은 꼬마의 발라드’, 조안 스파르의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 드니 부르도의 ‘이웃들’, 스타니슬라스의 ‘황당한氏 이야기’, 토마스 오트의 ‘야만’, 바루&다비드 B.의 ‘엄마는 문제가 있다’ 등 여덟 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 ‘라소시아시옹’ 출판사가 유럽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발간한 것으로 국내 작가주의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도 꽤 알려져 있다. 기발한 착상과 블랙유머, 독특한 그림 스타일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 없이 깨뜨린다. 뒤통수를 한 대 맞았지만 ‘시원한’ 느낌이랄까. 1차분 8권을 한 묶음으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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